인간 박정희는 대통령이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다. 그 권력 때문에 산업화를 밀고 나갔다. 인간 전태일은 노동자였다. 가장 초라한 미싱공이었다. 그 기술 때문에 산업화의 희생양이 됐다.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극명했던 두 삶이다. 그러면서도 비참한 마지막이 닮았다. 박정희는 믿었던 부하가 쏜 총탄에 숨졌다.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붙이고 숨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것이 11월14일이고, 전태일 열사가 사망한 것이 11월13일이다. ▶전 열사가 박 전 대통령에 쓴 편지가 남아 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시다공이)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1970년 쓴 이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답(答)이 있다. ‘매월 정기적으로 전국의 노임상태를 보고받고 있다…노동단체가 파업 등을 벌이기 시작하면 나라의 산업발전은 저해 받게 마련이나 노동단체가 나서기 전에 기업인들은 근로자의 적정임금 및 후생 등에 유의, 품질관리나 품질향상 등에도 이바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만일 부당하게 낮은 임금을 주는 기업체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해서 적정임금을 주도록 유도하라’. 1973년 6월5일, 수출공단에서 한 말이다. ▶전 열사의 편지는 박 전 대통령에 전달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는 전 열사가 숨진 뒤에 내려졌다. 시공(時空)을 달리하는 이 ‘편지’와 ‘지시’를 ‘대화’(對話)라 칭하는 건 지나친 감상이다. 전 열사는 편지에서 최저임금제, 근로시간 단축을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은 지시에서 최저임금제, 근로 시간 단축을 거론하지 않는다. 둘이 말하는 방향까지도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박 전 대통령 지시가 전 열사 죽음에서 기인하고 있음은 추론해도 좋을 듯하다. 그만큼 전태일 분신이 정부에 준 충격이 컸다.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지 38년 됐다. 전 열사가 사망한 지 47년 됐다. 그 둘의 생일과 사망일이 겹치는 요즘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종로 5가 전태일 동산 앞에서 추모식이 거행했다. 상암동 박정희도서관 앞에는 박정희 동상 기증식이 열렸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박정희 추모’와 ‘전태일 추모’가 충돌했다. ‘만일 둘이 살았더라도 47년을 충돌했을까.’ 두 고인(故人)의 이름을 빌린 ‘반세기 갈등’을 보며 하게 되는 부질없는 상상이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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