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3월7일. 해방 후 9년만에 축구 한일전이 벌어졌다. 양국 국가대표가 맞붙는 첫 경기였다. 온 국민이 일본전 승리를 기원했다. 일본으로 떠나는 선수단은 차라리 전쟁에 나서는 군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가세했다.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질 각오로 싸우라.’ 결과는 5 대 1 대승이었다. 이후의 한일전이 전부 그랬다. 선수도, 감독도 전투의식을 말해야 했다. 그래야 국민이 좋아했다. 1998년 일본으로 떠나던 차범근 감독의 한 마디도 유명했다. “나는 일본에게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평창 동계올림픽도 예외는 아니다. 양국 모두에서 상대를 향한 적의(敵意)가 난무한다. 쇼트트랙 여자 계주 예선전에서 한국 선수가 넘어졌다. 일본 인터넷에 실황 스레드가 들끓었다. ‘한국 넘어졌다’, ‘만세’, ‘한국 푸하하하’…. 한국 선수들이 점차 간격을 좁혔다. ‘다시 굴러라 조선인’ ‘캐나다 힘내라’…. 며칠 뒤 이상화 선수가 출전했다. 사전 인터뷰에서 ’일본 선수가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전혀(신경 쓰지 않는다), 그 선수는 아직 올림픽 금메달도 없고’…. 방송은 이 멘트를 계속 내보내며 시청률을 끌어올렸다. ▶18일 밤 강릉 스피드스케이팅장. 고다이라 나오가 출발했다. 놀라운 스피드로 치고 나갔다. 500m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관중석에서 탄식이 나왔다. 36초 94,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이어 이상화가 출전했다. 부상 후유증을 이겨낸 출발이었다. 100m까지 1위, 200m도 1위였다. 3코너를 도는 순간 사달이 났다. 삐끗하며 속도가 떨어졌다. 37초33, 은메달이었다. 이상화가 울었다. 트랙을 도는 그를 보며 관중도 울었다. 안쓰럽게도 예상이 맞았다(본보 2월 6일자 지지대, ‘3연패의 무게-이상화’). ▶그 순간,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울며 트랙을 돌던 이상화 앞을 일장기를 두른 나오가 막아섰다. 다가가더니 이상화를 안았다. 이상화도 나오 품에 안겼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함께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휘날렸다. 이때 시작된 박수가 한동안 경기장을 메웠다. 나오는 “상화는 내게 친구 이상의 존재”라고 했다. 이상화도 ‘멋진 한일전이었다’고 했다. ▶현해탄에 뛰어들 필요도, 증오를 퍼부을 이유도 없는 둘이었다. 그저 10년을 얼음판에서 마주쳐온 친구였다. 적어도 그 순간, 두 선수를 본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일전이라면 왜 이를 부득부득 갈아야 했을까…’. 하지만 한일전은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또다시 증오하며 서로를 트집잡을 것이다.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 소중해지는 그날 밤의 추억이다. ‘한일전도 아름다울 수 있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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