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지난해 11월21일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만인의 방’을 개관했다. 만인의 방은 ‘만인보(萬人譜)’를 집필했던 고은 시인의 안성 서재를 그대로 재현한 특별한 방이다. 육필원고, 탁자, 메모, 안경 등 관련 자료들이 모두 전시돼 있다.
‘만인보’는 시 4천1편, 총 30권으로 발간된 고은 시인의 연작시다. 집필 기간만 30년이며, 5천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서울시가 ‘만인의 방’을 조성한 것은 만인보가 3ㆍ1운동 정신과 닿아있다고 보고, 내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3억 원의 예산을 들였다. 개관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연작시 만인보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시대를 이끌어왔다. 서울시도 시민들 힘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만인보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며 ‘만인의 방’ 개관 의의를 밝혔다.
‘만인의 방’이 개관 몇개월만인 지난달 27일 철거에 들어갔다.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게 서울시 입장이다. 전시됐던 물품은 시인에게 돌려줄 예정이다. 서울시가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이 불거지고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면서 철거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 모시기에 공을 들였던 수원시도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수원시는 2013년 광교산 자락의 문화향수의 집을 9억5천만원 들여 리모델링 해 고은 시인의 거처로 제공했다. 고은 시인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뒤 5년여간 거주해온 광교산 집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수원시에 밝혔다.
수원에 건립하려던 고은 문학관도 무산됐다. 수원시는 팔달구 장안동 한옥기술전시관 뒤편 시유지 6천㎡에 문학관을 건립 계획이었다. 200억원의 건립비는 고은재단이 내고, 시는 부지를 무상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을 반영해” 고은 문학관 건립계획을 최종 철회했다.
고은 시인은 최근 단국대 석좌교수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지난해부터 맡고 있던 KAIST 초빙석좌교수직에서도 물러났다. 교육부는 ‘사회적 논란’이 된 고은 시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 고은 시인의 시·수필 등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 11종에 실려 있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됐고, 그래서 모시기 경쟁이 치열했던 시인의 성추행 파문으로 이젠 흔적 지우기 경쟁이다. 미투 운동에 따른 부정 여론과 비판을 거스를 수 없어서다. 시인의 ‘그 꽃’(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누가 패러디 했다. ‘추행’(내려갈 때 들켰네 올라갈 때 생각 못한 추행)이란 제목으로.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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