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6. 남한산성 수어장대

통한의 역사… 절절한 외침

위-1909년 수어장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 원판), 아래-현재의 수어장대
위-1909년 수어장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 원판), 아래-현재의 수어장대
남한산성 안에서 현존 건물 중 가장 멋진 건물을 꼽는다면 단연 수어장대다. 수어장대는 서쪽에 자리한 장대라는 의미에서 ‘서장대’로 더 많이 불렸다.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다. 1972년에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 번호가 의미 없다고도 하나 제1호는 각별한 가치가 있다. 가장 처음 지정되었다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서장대에 오른 숙종

1688년(숙종 14) 2월 29일 저녁 숙종은 남한산성에 당도했다. 4박 5일 일정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寧陵)에 거둥했다가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숙종은 이미 2월 26일에 영릉으로 가면서도 남한산성에 들렀다. 오가면서 두 차례나 방문했을 만큼 숙종이 공을 들인 행사였다.

 

남한산성 동문에 도착한 숙종은 가마를 타고 서문 쪽의 서장대에 올랐다. 서장대에는 광주 유수 이세백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숙종은 번잡한 의례도 생략한 채 측근들만 데리고 단출하게 올랐다.

 

서장대에 오른 숙종은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절로 서글픈 감회가 일어난다”고 했다. 숙종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병자호란 당시 전사한 신성립과 지여해의 자손, 전공을 세운 서흔남의 자손에게 관직을 내리고 다른 관련자들에게도 음식물을 주고 품계도 올려주었다.

 

조선의 국왕 중 처음 남한산성 서장대에 오른 국왕이 숙종이다.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남한산성을 대폭 보수한 국왕도 숙종이었다. 오늘날 남한산성 외성으로 불리는 봉암성과 한봉성 그리고 신남성의 시작이 모두 숙종의 손에서 이뤄졌다.

 

조선은 병자호란 패전으로 청과 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성벽의 수리나 신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돌 하나조차 맘 편히 쌓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1673년(현종 14) 말에 청에서 ‘삼번의 난’이 발생했다.

청이 내부문제로 골몰하면서 조선에 대한 감시가 약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즉위한 숙종은 강화도에 돈대 48개를 쌓고 북한산성을 축조했다. 남한산성 보강도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숙종이 서장대에 오른 뒤 그 행적은 후대 국왕들의 모범이 되었다. 숙종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영조를 비롯해 정조, 철종, 고종이 남한산성을 찾았다. 남한산성을 찾은 국왕들은 하나같이 서장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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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망루 보호각

■서장대의 역사

서장대는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서남북에 조성한 4개 장대 중 하나다. 장대란 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설치한 장수의 군사 지휘소를 말한다. 서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498m) 정상에 있다. 멀리 서울의 강서, 강동, 강남 일대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좋아 당대에도 장대 중 가장 전망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또 수원 화성 서장대나 북한산성 동장대 등 전국에 손꼽히는 장대도 있으나 서장대처럼 2층으로 된 장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한산성에는 나중에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면서 5개 장대가 있게 되는데 이 중 현전하는 건물은 서장대뿐이다. 그래서 더 귀하다.

 

서장대를 오늘날 모습처럼 2층 구조로 지은 사람은 1751년(영조 27년) 수어사 이기진이었다. 처음 서장대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층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17세기 말 무렵에 제작된 <남한산성도>(영남대 박물관)에 동서남북 장대 모두 1층 누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진이 서장대를 지을 당시에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기진은 영조가 이곳을 다녀간 의미를 되새겨 2층 누각을 완성한 뒤 건물 바깥쪽에는 ‘서장대’라는 현판을,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서장대’라 한 것은 처음 이 장대의 옛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무망(無忘)’이란 임금이 치욕을 당한 병자호란의 통한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올라 동으로는 한봉성을, 서쪽으로는 삼전도비를 바라보면서 북벌을 추진한 효종의 뜻을 이어받아 원수를 갚자는 권고를 담았다. 어찌 보면 ‘서장대’나 ‘무망루’ 모두 옛 일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읽힌다.

보호각에 있는 ‘무망루’ 현판
보호각에 있는 ‘무망루’ 현판

■‘서장대’에서 ‘수어장대’로

오늘날 수어장대의 모습은 1836년(헌종 2) 광주 유수 박기수(1774~1845)의 손에서 탄생했다. 박기수는 서장대를 다시 손보고 현판도 ‘수어장대’로 고쳐 달았다. 글씨는 그의 형 박주수가 썼다. 현재 수어장대 경내에 있는 큰 바위에도 ‘수어서대(守禦西臺)’라 새겨 있는데 이 역시 박주수 글씨다.

 

현판을 보면 ‘수어장대’라는 큰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세병신계하하한(歲丙申季夏下澣)’이라 새기고,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과 ‘반남박주수군여지인(潘南朴周壽君與之印)’이라는 낙관을 남겼다. 현판을 조성한 해가 1836년 6월 하순이며, 글씨를 쓴 사람이 박주수라는 의미다. 집금오대장군은 이 글씨를 쓸 당시 박주수 직함인 판의금부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반남은 박주수의 본관이고, 군여는 호다.

 

이때 새로 고쳐 단장한 건물이 현재 수어장대의 원형이다. 오늘날 수어장대는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2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1층 안쪽에는 사방이 트인 방을 만들었는데 그 네 기둥이 2층의 바깥기둥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지붕은 웅장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수어장대는 이후에도 계속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쳤다. 1960년대 사진들을 보면 ‘수어장대’ 현판의 위치가 바꿔있고 현판도 검정바탕에 흰색글씨로 되어 있다. 모두 수어장대를 잘 보존하겠다는 의도로 이뤄진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원형을 변형시키고 말았다. 건물의 세부 사항도 몇 차례 바꿨다. 한국전쟁 이후 문화재 관리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2년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09년의 유리원판 사진을 토대로 원형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남한산성은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그 덕분에 1836년에 고쳐진 서장대의 옛 모습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바로 수어장대 옆에 자리한 무망루 보호각이다. 원래 수어장대 경내에는 이 건물이 없었다. 이 보호각은 1989년에 짓고 이 안에 ‘무망루’라는 현판도 새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또 현재 걸려있는 ‘수어장대’ 현판도 원본을 본떠서 새로 만든 것이다. 1836년에 조성한 진짜 ‘수어장대’ 현판은 현재 상자에 담아 수어장대의 2층 누각에 보관하고 있으며, 영조 대에 조성한 ‘무망루’ 현판 역시 2층 누각 안쪽 벽면에 걸려있다. 남한산성박물관이 완공되면 그때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 한다.

‘수어서대’ 바위
‘수어서대’ 바위

■한강물로도 다 씻지 못할 통한의 역사 앞에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행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쪽에 있다. 서장대에서 서문(우익문)까지는 대략 0.6km로 어른 걸음으로 5~6분 거리다. 서문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조선 측과 접촉하거나 편지 또는 국서를 전달할 때 이용한 곳이다.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성을 나설 때도 이 문을 이용했다.

 

하지만 서문은 1637년 1월 하순에 조선군이 청군 공격을 크게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서문 책임자는 수어사 이시백이었다. 청군은 야간에 세 차례나 서문 방면의 성곽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조선군의 분전으로 실패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성벽의 얼음과 눈이 모두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정도로 큰 승리였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는 서장대에 올라 이런 글을 남겼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에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운 곳이다. 비록 한강물을 다 기울인다 해도 그때의 더러운 노린내를 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서장대에 올라 풍경이나 즐길 뿐 마음속 깊이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양심을 잃어버린 자라 했다.

 

오늘 다시 수어장대를 오르면서 이 말을 떠올려본다. 수어장대 역사를 되짚어 보면 김만기의 절절한 외침이 지금도 빛바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도 한반도가 평화롭지 않아서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도움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학예사 노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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