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9. 임진왜란 당시 육전서 첫 승리를 거둔 ‘해유령전첩지’

해유령 넘는 왜적 격파… 패전 조선군 모처럼 ‘사기충천’

해유령전첩지 전경
해유령전첩지 전경
2015년 12월에 세운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에는 임진왜란 초기의 급박한 사정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성 방위군은 왜적이 미쳐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인 5월 2일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 방어진을 속수무책으로 포기한 부원수 신각은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 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 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 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개를 넘는 왜적을 급습하여 적병 70여 명을 한 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조선군이 해유령에서 승리한 뒤부터 양주 일대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왜군은 조선군을 대규모 전투로 끌어내지 못한 채 유격전에 말려들어 지쳐갔다. 경기도 일대에서 신각 장군에 대한 칭송이 자자해지자 백성들은 조선이 아직 완전히 패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믿음도 잠시, 평양에서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내려와 반역자 신각을 즉시 처단하라는 어찰과 보검을 전해 주었다.

 

충현사
충현사
이 참담한 사건의 전후사정은 이러하다.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수비를 포기하고 달아난 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부원수 신각이 명을 어기고 도주했다고 국왕 선조에게 보고했다. 이때 우의정 유홍도 김명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신각의 처형을 주장했다.

선조는 다른 정보를 받지 못한데다 정승까지 처벌을 주장하자 신각의 처형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저물기 전에 신각이 이끄는 부대가 양주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하고 왜군 70여 급을 거두었다는 승전보를 전해온 것이다. 선조는 섣부른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서둘러 전령을 보내 신각을 처형을 막도록 명을 내렸으나 현장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신각이 죽은 뒤였다.

 

이 전투 직전에 충주에서 신립이 대패하고, 용인에서도 이광이 대패하자 선조는 한양을 포기하고 몽진을 서둘렀다.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5만 군사를 총지휘했던 전라감사 이광은 유리한 곳을 확보하여 적의 허실을 엿보자는 권율의 제안을 물리치고 전투를 독려했으나 선봉장이 겁을 먹고 말을 돌리는 바람에 조선군은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듯” 전투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당시 상대한 왜군은 2천에 불과했다. 패전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으나 이광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때 이광의 휘하에 있었던 권율이 후퇴하면서 전라도 병력을 잘 보전하여 이치전투를 비롯해서 독산성을 거쳐 행주대첩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 해유령, 파죽지세 왜군 육지서 첫 승전보

해유령은 양주 연곡리에서 파주 광탄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좌우로 낮은 산이 둘러싸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할 수 있다. 이 부근에는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을 찾을 수 있다. 

해유령 아래 동네에는 해유령 전투에서 죽은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이 있고, 부근에는 신각 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진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전첩비가 서 있는 마을의 버스정류장 이름은 게너미가 아니라 ‘기내미삼거리’이다.

 

1977년 4월, 양주시민들이 뜻을 모아 해유령 전첩지에 높이 10.6m, 둘레 4.8m, 기단 면적 132m의 기념비를 세웠다. 같은 해 10월에 전첩지는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기념비는 국난을 극복한 신각 장군과 함께 싸운 무사들의 기개를 나타내듯 하늘로 곧게 높이 솟아있다. 

해유령전첩비
해유령전첩비
기념비 아래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신각, 이양원, 이혼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현사(忠顯祠)가 있다. 해유령 전첩 추모제향은 충현사 제전위원회가 매년 5월 19일에 제향을 올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신각 장군과 무사들의 고귀한 넋을 위로하고 있다. 2015년 12월에 해유령 전투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한글로 촘촘히 새긴 비석을 다시 세웠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해유령 전첩지’를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육지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이 전투의 경과와 신각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높았다. …신각이 비록 무인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 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 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장군이 곧바로 처형을 당하는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았을 양주 백성들의 두려움과 분노가 어떠했을까. 이러한 때에 민심을 달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승전을 거듭한 빼어난 장수가 있었다.

 

1594년 12월, 성균관 생원 유숙이 선조에게 상소하여,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을 요청하며 신각의 억울함을 전달했다.

“신각은 죽을힘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 주첩(奏捷)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伏劍)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하기를 ‘신각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신각의 공훈을 생각하여 승급시키고 상을 내려 나라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삼군(三軍)의 의기를 고무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592년 8월 초에는 의병장 조헌이 청주성을 회복하고, 상소를 올려 신각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을 요청했다.

 

■ 해유령 전투의 영웅들

충주전투에 참전했던 고언백이 해유령 전투에서 공을 세워 양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고언백은 신각의 승리를 제대로 계승한 장수였다. 당시 양주의 일부 지역은 왜적이 차지했으나 곳곳에 고언백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매복해 있기 때문에 왜군도 함부로 다니지 못했다. 

당시 비변사의 보고를 보면, “양주목사 고언백은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싸움에 이겨 위엄과 명성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호응한다”고 했다. 또한 “진을 쳐 대전한 적은 없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적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또 적의 형세를 잘 염탐하여 혹 야경(夜驚)도 하고 혹은 숲속에서 저격하였는데 자신이 사졸들보다 앞서서 싸웠다”며 고언백의 지략을 찬양했다.

 

<실록>을 통해 1593년 1월 현재의 경기도에는 양주에 방어사 고언백의 군사 2천 명, 안성군에 조방장 홍계남의 군사 300명 등이 확인된다. 주목할 것은 고언백의 부대에 승군(僧軍) 400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 안내석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 안내석
■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사실들

고언백은 충주전투에서 신립의 척후장이 되어 적을 여럿 죽였고, 해유령 전투에서도 선봉에서 싸웠다. 평양에서는 한밤중에 대동강 능라도에 주둔한 왜적을 기습하여 1천여 명을 격파하였다. 양주 목사로 임명되자 왜적에게 투항한 백성 6천여 명과 승려를 불러 모아 왜적을 일곱 번이나 물리쳤다. 선조가 “평안도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고언백 장군의 공이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경상도 방어사로 부임한 고언백은 함안에서 싸웠고, 경상병사가 되어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하는 등 임진왜란 때 257번이나 싸웠던 맹장이자 지장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제흥군에 봉해졌던 고언백의 최후도 비참하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임해군을 제거할 때, 임해군의 심복이라 하여 살해되었던 것이다.

 

해유령 전투는 육전에서 관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는 점, 평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련한 점에서 주목해야 할 전투이다. 해유령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도 억울한 죽음을 맞은 신각 장군은 물론 장군의 뒤를 이어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군사를 독려하여 양주와 경기도를 굳건히 지킨 고언백 장군도 기억해야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난을 당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선 양주를 비롯한 경기도의 이름 없는 무사와 승군들의 존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산(홍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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