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은 고려 말 신흥사대부로서 고려의 개혁을 위해 분투하고 좌절하면서, 고려의 운명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9년 동안 유배와 유랑생활을 겪은 후에, 1388년 이성계의 군막을 찾아가 만났다. 그가 군사력을 갖춘 이성계를 찾아가 만난 것은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 한 고조를 만든 장량이라 자임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단순히 야심가나 지략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개혁사상가요, 경세가였으며, 새로운 국가의 통치질서를 설계한 사람이었다.
고려 말 개혁가들에게 개혁을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 것이 바로 <주례(周禮)>였다. 개혁가들은 법제도의 문란을 <주례>의 육전체제가 문란해진 것과 결부하여 인식했다. 주공이 지었다는 <주례>는 본래 명칭이 ‘주관(周官)’이었다. 일원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망라하여 규정한 통치규범이었다. 전체 구성은 ‘육관(六官)’으로 되어 있으며, 각 이름은 ‘천지’와 ‘춘하추동’으로 불러서, 인간의 질서를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조화를 이루고자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 육관에 상응하여 치전(治典), 교전(敎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형전(刑典) 사전(事典)의 ‘육전(六典)체제’로 관제를 편성했다.
<주례>는 위작이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 성격에 관해서도 학자들의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주례>의 실체는 역사 속에 엄연했다. <주례>는 경세론적 개혁론을 제기할 때마다 줄곧 제도 구상의 준거 틀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그 영향이 확인된다. 고려 말 김지의 <주관육익>이라든가,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도 <주례>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394년(태조 3) 정도전이 지어 왕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은 <주례>의 육전체제를 전면에 표방했다. ‘전(典)’이란 술어도 처음 쓰기 시작했고, 서문은 육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했다. <조선경국전>은 <주례>의 6전에 상응하여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을 두었다. 치전, 예전, 정전은 주례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으나, 교전은 부전으로, 형전은 헌전으로, 사전은 공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원(元) 나라 <경세대전(經世大典)>의 육전과 동일하다. <경세대전>도 <주례>의 영향으로 성립된 법전이었다. 정도전은 새로운 국가를 위한 통일적 성문 법전의 원형을 <주례>의 육전체제에서 구했다.
<조선경국전>으로 시작되는 ‘경국대전 체제’는 유교적 가치를 성문법전으로 구현한 ‘유가적 법치’로서 법가의 법치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조선경국전>에 담긴 사상은 무엇일까? 군주에 관해 언급이 없는 <주례>와 달리, <조선경국전>은 육전의 앞부분에 군주에 관한 사항을 배치하고 있다.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정국본(定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 5편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군주를 일정하게 규율하는 의미가 있었다.
‘정보위’ 편은 군주권의 정당성을 논설하는 것으로, 유가적 통치를 기획한 정도전에게 통치론의 출발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적 핵심은 ‘인정론(仁政論)’이었다.
“주역(周易)에 말하길,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니,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仁)이라’고 했다. 천자(天子)는 천하의 받듦을 누리고, 제후(諸侯)는 경내(境內)의 받듦을 누리니, 모두 부귀가 지극함이다. 현능한 사람들은 지혜를 바치고, 호걸들은 힘을 바치며, 백성들은 분주하여 각기 맡은 역(役)에 종사하되, 오직 인군의 명령만 복종할 뿐이다. 이것은 위(位)를 얻었기 때문이니, 큰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위(位)는 유가적 질서를 가리키며, 인(仁)은 그런 질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장치였다. 군주의 지위가 높고 귀하지만 천하는 지극히 넓고 백성은 지극히 많다. 수적 다수는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정도전의 민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정치란 이들 다수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정(仁政), ‘어진 정치’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이는 통치권력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에 비유하면 국민주권 내지 민주주의에 상당하는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인정론’은 ‘유가적 법치’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육전, 그러니까 치전(治典)의 앞에 둔 ‘총서(總序)’에서 자신의 핵심적 정치론인 ‘재상중심정치론’을 피력했다.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하여 지향한 왕도(王道)정치는 유능한 재상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군주는 세습제이므로 능력이 없는 군주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니 유능하고 현명한 인재를 재상으로 뽑아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재상론은 군주제의 한계를 합리적으로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또한 ‘예치론’을 피력했다. ‘예전’에서 ‘예’는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질서’라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헌전’에서 예치와 덕치가 우선이고, 정형(政刑)은 보충적인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천지는 만물을 봄에 생육시키고 가을에 정리하며, 성인은 만민을 인(仁)으로 사랑하고 형(刑)으로 위엄을 보인다. 대개 정리하는 것은 그 근본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고, 위엄을 보이는 것은 그 생명을 아우르기 위한 것이다. 가을은 천지에서 의기(義氣)인데, 형(刑)은 추관(秋官)이 된다. 그 작용이 동일한 것이다.”
정도전은 일단 형벌의 사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형벌은 정치를 보조할 뿐이다. 2차적이고 보충적인 것이다. 형벌을 씀으로써 형벌을 쓰지 않게 하고, 형벌로 다스리되 형벌이 없어지기를 기대했다. 만약 정치가 이미 제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형벌은 불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요컨대 형정의 궁극적 목표는 형벌규정이 불필요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를 위해 백성이 법을 잘 모르고 금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잘 알릴 것도 강조했다.
정도전의 인정론, 재상중심정치론, 예치론 등은 군주의 전제적 권력행사에 대한 견제장치의 의미가 있다. 군주권력의 근거이면서도 제한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이다. 현대의 법치주의에서 권력을 부여하는 수권(授權)조항과 권력을 제한하는 제한(制限)조항을 동시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조선의 경우는 처음부터 중국에서와 같은 전제적 황제권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군주는 유교적 가치에 의해 확실하게 규정되고 있었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명분이라든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도 근본적 체제의 변화가 없이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도 이러한 울타리 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유가적 가치와 질서로 전제권력까지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 조선시대 ‘유가적 법치’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나중에 태종이 된 이방원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패배했다. 그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훗날 정조가 뒤늦게나마 <삼봉집>을 간행한 것은 경세가로서의 면모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경국전>에 담은 이상은 조선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 체제’를 이루는 기초가 되어 전해졌다.
<조선경국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성문 법전을 갖춤으로써 합리적인 통치질서의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물리적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닌 다수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하는 정치를 지향했다. 군주 혼자 하는 정치가 아닌 유능하고 현명한 인재에 의한 정치를 추구했고, 자의적 권력을 견제하고 자연질서와 인정에 부합하는 정치 등을 제도화했다. 최근 우리 사회는 헌법 개정 논의를 하고 있다. <조선경국전>은 우리 헌법 생활에 중요한 역사 유산이요 훌륭한 자산이다.
김태희(다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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