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어깨걸이가 앙증맞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칼국수가 나올 때쯤 그가 얘기했다. ‘요즘 이걸로 취재하고 있어’. 그 가방이 그런 거였다. 아버지를 취재하는 용도라 했다. “아버님이 100세가 가까워 오시는데. 찾아 뵈면서 느꼈어. 아버지는 아버지 일생을 얘기하실 때 가장 활력이 있으시더라고. 당신의 과거 얘기가 가장 신명나는 소재인 거야. 그래서 계속 들어 드리려고 들고 다녀. 요즘엔 나도 기자야.”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진짜 이유가 따로 보였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찾아뵙기가 귀찮아지더라고. 꾀도 나고. 그런데 이걸 결심하고부터는 책임감이 생겼어. 아버지도, 나도 만나는 날이 기다려지는 거지.” 진짜 이유는 그거였다. 아버지 찾아뵙기를 스스로 강제하기 위한 규칙이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를 꼬박 찾아뵙기로 한 아들의 약속이었다. “될지 모르지만, 내친김에 책을 내드리려고.” 얘기를 들었던 게 2년여 전이다. ▶얼추 다 돼가는 모양이다. 언론인의 시각으로 봐달라며 초안을 보내왔다. 원고 곳곳에 열성이 배어 있다. 직접 들어야 나올 수 있는 ‘팩트’들로 꽉 찼다. 자료 꽤나 뒤졌을법한 연대별 정리도 눈에 띈다. 그만하면 됐다 싶은데, 본인 생각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제목이 유치하지 않은지, 사진을 어떻게 배열할지, 표현 문구는 서툴지 않은지…. 묻고 또 묻는다. 팔지도, 팔리지도 않을 책이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 못지않은 열성을 쏟아붓고 있다. ▶정창섭식 일 처리는 늘 그랬다. 경기도 부지사 때도 완벽했다. 바늘구멍 틈새도 없는 원칙주의자였다. 서슬 퍼런 지시에는 이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덕에 오래 했다. 민선 3기부터 민선 4기까지 내리 행정 부지사를 했다. 민선 도지사보다 길었던 ‘5년 부지사’였다. 직업 공무원의 꿈이라는 행안부 1차관도 역임했다. 그런 정창섭이 손수 만드는 책이다. 아버지를 위해 난생처음 하는 일이다. 만족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다. ▶그 역시 퇴역했다. 이순을 넘긴 지 오래다. 남들은 자기 자서전 쓰느라 바쁘다. 그런데 아버지 자서전을 쓴다. ‘정재근. 1922년 5월 27일 황해도 연백 출생. 용산 세무서에 9급 공무원 합격. 동대문에 세무사 개업. 현역 최고령 세무사.’ 아들 ‘정창섭’이 정리한 아버지 ‘정재근’의 일생이다. 이 기록을 위해 두 부자(父子)는 2년여를 만나고, 대화하고, 눈 마주쳤을 게다. 눈을 보며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 이보다 더한 효(孝)가 있을까. 통계 중에 이런 게 있다. -하루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시간 13분, 대화하는 시간 35초-.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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