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2. 행주대첩<구비>

투석전 불사… 백척간두 조선에 ‘승전보’

1970년에 세운 행주대첩구비 비각. 고양시 문화예술과 제공
1970년에 세운 행주대첩구비 비각. 고양시 문화예술과 제공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은 행주대첩을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전투로 높이 평했다. 그는 “권율이 행주에서 크게 이긴 것이나,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힘껏 싸운 것은 당시 가장 큰 공으로 참으로 중흥의 근본이 되었다”고 했다. 

‘행주대첩<구비>’는 전쟁의 환란에서 조선을 구한 권율의 공로와 행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의연한 뜻이 서린 경기도의 귀중한 유산이다.

■ 평양성 전투 뒤 ‘코리아 패싱’을 당한 조선군

임진왜란기 행주산성 전투를 ‘대첩’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전투가 일본군을 한강 이남으로 몰아낸 결정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 크게 패한 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추운 겨울 날씨에다 전쟁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고 병력도 전체적으로 40% 이상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명군 역시 벽제관 전투(1593.1.25.~1.27)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평양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꺼렸다. 명군 지도부는 조선의 관군과 의병에게도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하라고 권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군과 강화 회담을 시작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코리아 패싱’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달랐다.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사기가 충천했다. 그래서 승리 여세를 몰아 명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 서울을 수복한다는 작전을 구상했다. 당시 서울 주위에 포진한 관군과 의병의 규모는 강화·수원·양주·여주·양근·안성 등지에 약 2만 명 정도였다. 이곳은 서울까지 하루 또는 하루 반나절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여서 언제라도 군사 동원이 가능했다.

 

권율은 문관으로서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도 광주 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5월 중순 전라도 관찰사 이광 등이 남도근왕병을 조직해 상경할 때 권율은 방어사 곽영의 중위장이 되어 북진했다가 용인에서 일본군에게 패해 돌아왔다. 그 뒤 의용군 1천500여 명을 모집, 이치(梨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해 나주 목사에 임명되고 곧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1593년 2월 초순 권율은 명군과 호응해 서울을 수복하고 일본군의 급습을 피하기 위해 서울 외곽에 진을 쳤다. 이 고지가 바로 행주산성의 중심부였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도착하자 이틀간 목책을 만들고 인근 주민으로 군사력을 보강했다. 당시 권율이 이끈 병력 규모는 기록마다 다른데 대략 2천300여 명 또는 4천여 명으로 보고 있다.

1602년에 세운 행주대첩비. 문화재청 제공
1602년에 세운 행주대첩비. 문화재청 제공

■ 행주대첩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은 권율 부대가 행주산성에 진을 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공격 준비를 했다. 1593년 2월 12일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지형이 좁아 대규모 병력을 일시에 투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격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권율이 이끈 조선군은 병력의 열세를 딛고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산성 가까이 돌진하자 각종 총통, 화차, 수차석포, 화살 등을 발사했다. 일본군이 마른풀에 불을 붙여 바람을 이용해 성을 불태우려하자 물을 퍼부어 불을 꺼버렸다. 승병들은 일본군이 산성 서북쪽의 승군 진영을 돌파하려 하자 재를 뿌리면서 항전했다. 또 조선군은 화살이 바닥나자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투석전도 벌였다. 일본군은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권율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 여겼다”(행주대첩구비)는 기록처럼 조선군을 우습게 알고 공격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본 장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행주산성 패전 보고서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30리 되는 서쪽 한강 끝에 있는 행주산에 성 하나를 만들어 놓고 조선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2만 명을 뽑아 명군의 군량을 모아 쌓아둔다고 하므로 명군이 나오기 전에 쫓아버리려 했습니다.”

 

일본군은 권율이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했다고 판단하고 명군의 출병을 미연에 막고자 행주산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공격하는 바람에 전세 역전을 자초하고 말았다.

1845년에 다시 세운 행주대첩중건비. 고양시 문화예술과 제공
1845년에 다시 세운 행주대첩중건비. 고양시 문화예술과 제공

■ 두 개의 행주대첩<구비>

전쟁이 끝나고 1599년에 권율은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63세였다. 그가 세상을 뜬 지 한 돌이 되자 휘하 보좌관과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 비를 세웠다. “권율 공이 예전에 행주대첩에서 공이 매우 크므로 그 언덕 위에 비를 세워 공적을 적어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행주대첩구비)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비가 ‘행주대첩<구비>’다.

 

오늘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행주대첩<구비>’는 2기가 함께 지정되었다. 하나는 1602년(선조 35) 처음 세운 구비(舊碑:옛 비)로 현재 고색창연한 상태로 행주산성 경내인 덕양산 정상 부근에 있다. 비의 받침돌은 땅에 묻히고 몸체만 지상에 있다. 

비의 몸체도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금이 가고 깨졌는데 현재는 틈새와 깨진 곳을 보수한 상태다. 이 비문은 당대 문장가로 손꼽힌 최립이 짓고 글씨는 ‘한석봉’으로 더 유명한 한호가 썼지만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비의 뒷면에도 비문이 있는데 권율의 사위 오성 이항복이 지었다.

 

이 비는 풍화를 막기 위해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처음 비각을 세운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70년 행주산성 보수정화 공사를 하면서 옛 비각을 헐고 새로 건립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른 한 기는 1845년(헌종 11) 옛 비의 상태가 좋지 못하자 세운 중건비로 행주서원지(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 경내에 있다. 옛 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뒷면에 일부 내용을 추가해 세운 것이다. 비문을 보존해 후세에 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비는 1970년 행주산성 성역화의 일환으로 충장사(권율 사당)를 새로 조성하면서 그 앞으로 옮겨졌다가 2011년 3월 원래 자리인 행주서원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은 올바른 문화재 보존의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행주산성 충장사 입구의 행주대첩비 조형물. 문화재청 제공
행주산성 충장사 입구의 행주대첩비 조형물. 문화재청 제공

■ 행주대첩을 찾은 매천 황현

1899년(광무 3) 시인이자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행주산성을 찾았다. 외침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에 임진왜란 승전지를 찾은 것이다. 매천 나이 45세였다. 그는 행주산성을 바라보며 한시 한 수를 지었다.

지세는 한갓 험준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님을

나는 행주에 와서 알았네

산성이 이처럼 낮은데도

왜놈 귀신들 지금도 시름에 젖어 있으리

해 지는데 변방의 봉화는 꺼졌고

봄바람에 한강 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항상 밧줄 청할 뜻을 품고 살았는데

저무는 강가에서 눈물만 뿌리네

시(詩)로 당대를 울린 매천의 뼈아픈 시다. 매천은 행주산성에 아직도 ‘왜놈’ 귀신들이 그날의 패전으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데 왜 이 시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자탄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행주대첩<구비>는 행주대첩의 그날을 보여주는 오래된 역사다. 비가 그저 오래되었다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뜻과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저 비일 뿐이다. 행주대첩<구비> 2기의 존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소중한 이유는 다시는 외침으로 나라가 신음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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