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5일이면 영국 전역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린다. ‘가이 포크스 데이(Guy Fawkes Day)’라고 불리는 이 날은 가이 포크스가 1605년 11월5일 의회 의사당을 폭파시켜 잉글랜드의 왕과 대신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화약음모사건(gun powder plot)’이 실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왕실에선 왕의 무사함을 기뻐하며 불꽃놀이를 벌이도록 했으나, 훗날 많은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의미로 불꽃놀이를 벌였다. 이날 어른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무리 지어 행진한다. 혹자는 가이 포크스를 조롱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혹자는 또 다른 가이 포크스가 되기 위해 가면을 쓴다. 그렇게 11월5일은 신ㆍ구교도 모두가 즐기는 축제일이 됐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유명해진 것은 2006년 동명만화를 각색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덕분이다. 제3차 세계대전 후인 2040년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주인공 브이(V)는 사회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정권에 대항해 혁명을 꿈꾼다. 이후 하얀 얼굴에 올라간 입꼬리, 역 팔자 콧수염이 그려진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의 아이콘이 됐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인터넷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가 자신들의 로고이자 상징처럼 사용하면서 ‘익명’을 의미하는 도구로도 쓰이고 있다. 국내에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때 처음 등장했고, 2011년 뉴욕의 월가 점령 시위 때도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용돼 눈길을 끌었다. 이제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과 익명의 상징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시위와 집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다시 등장했다. 4일과 12일 두 차례 열린 촛불집회에 대한항공 직원들이 사측의 참여자 색출을 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가면을 쓰고 참석한 것이다. 재벌에 대한 직원들의 저항 집회에서 신분 노출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용된 사례는 처음일 것이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벤데타 가면’으로도 불린다. 벤데타는 스페인어로 ‘피의 복수’라는 뜻이지만 대한항공 직원들은, 지금은 희생자(Victim)지만 우리의 목소리(Voice)로 승리(Victory)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사주 일가의 갑질과 횡포에 상처를 입은 이들이 얼굴을 내놓고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회사, 사회 분위기가 직원들에게 가면을 씌웠다. 이들이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건지, 가면이 필요없는 날은 언제쯤 올까.
이연섭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