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잘사는 세상 소망 가득 담은 저수지
◇물에 담아온 오랜 꿈
물은 뭇 숨탄것들의 생명이다. 몸도 삶도 모두 물로 이루어진다. 그렇듯 먹고 마시는 일상부터 농사에 이르기까지 물이 없으면 삶은 불가능하다. 예부터 치수(治水)를 군주의 덕목이자 나랏일로 삼았던 까닭이다.
그저수지는 런 물을 인위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자연 강우를 가두었다 필요할 때 쓰는 일. 수원에도 화성 축성에 따른 대사업으로 만든 저수지가 몇 전한다. 그 중에도 축만제(祝萬堤)는 가장 큰 규모의 관개저수지다. 1799년(정조 23년)에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했다.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원대한 계획에 걸맞다.
축만제는 국내 최초로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된 저수지다. 201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제67차 집행위원회에서였다.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축조의 중요성과 가치 등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만석, 중농(中農)의 길
축만제는 서호(西湖)로 오래 불렸다. 본 이름 놔두고 서호로 불러온 것은 화성 서쪽의 위치한 때문이다(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오늘도 여기산 밑을 늠름히 지키고 있다.
서호는 운치와 문향(文香)이 남다른 이름이다. 중국 항주의 서호가 한시에도 자주 등장해서 옛 사람에게는 더 그윽했을 법하다. 서호 낙조 또한 이름을 널리 떨쳤으니 서정적으로도 더 깊이 들었겠다. 무엇보다 축만제보다 서호가 입에 편히 붙는 발음이니 기억하고 전하기에도 좋았다. 일상에서도 ‘저수지’보다 ‘호수’라는 운치 있는 이름을 더 애호하지 않던가.
하지만 축만제에 담긴 정조의 의지와 원대한 뜻은 잊지 않는다. 화성 축성에 담아낸 꿈, 즉 백성이 두루 잘 사는 신도시라는 원대한 기획을 위한 농업용 관개저수지였으니 말이다. 당시 농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온 비를 가둬두는 저수지가 가뭄에 따른 흉작의 고통을 크게 덜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화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북지(北池)는 수원화성 북문 북쪽에 있는 만석거(萬石渠, 1795년 완성)다. 수원 사람들은 조기정방죽으로 불러왔는데, 최근에는 본래 이름인 만석거를 되찾아 쓰고 있다. 남지(南池) 만년제(萬年堤, 1797년 축조)는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동지(東池)는 수원시 지동에 있었다.
축만제는 만석거와 만년제에 이어 축조되었다. 문헌상 제방의 길이는 1,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다. 몽리면적(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는 곳) 232두락에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본다. 화성 주변 저수지 중의 최대 규모로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었던 것이다.
축조 4년 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 도감관(都監官)·감관(監官)·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했다. 여기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한 기록이 있다니, 축만제의 관리가 철저했던 게다.
◇풍경을 거느리는 서호
축만제는 이제 실용성을 떠나 아름다운 호수로 더 많이 찾는다. 긴 역사를 담고 있는 둑방길과 함께 호수를 보면 축만제의 풍경은 더없이 멋지게 완성된다. 거기에 하나를 다시 얹으면 축만제 격조가 격상되니 바로 항미정(杭眉亭)이라는 아담한 정자다.
항미정은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가 축만제 남쪽에 지었다. 구릉을 이루는 지점의 높이에 자리하고 있어 조망이 좋다. 항미정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가 수원팔경 중의 하나로 손꼽혀온 까닭이다. 예전에는 낙조와 함께 잉어도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13년에 발견된 우리나라 고유 어종인 서호납줄갱이도 살았는데, 아쉽게도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학명을 따로 받은 서호납줄갱이를 기리는 시에 저간의 사정이 짚인다.
“그 해 여름 미국인 생물학자 두 사람이 우리 식구 한 마리를 채집하여 잡아갔고, 1935년 시월 스무아흐렛날 우리 살던 서호 둑을 개수한다고 둑을 허물어 물을 다 뺐을 때, 호수 바닥이 드러나 그 때 둘 만남은 우리 서호납줄갱이는 마지막으로 이 땅, 이 지구에서 영영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지요.//그 후로는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게 되었어요 (…) 등빛은 암갈색, 배는 은백색, 푸른빛이 감도는 옆줄은 희미하고, 풀잎 같은 지느러미 하른거리던 연약하고 연약한 물고기랍니다.”
-김명수, 「서호납줄갱이」 일부
시에도 나타나듯, 서호납줄갱이 사연은 매우 애석하다. 그 납줄갱이가 계속 살고 있다면 서호가 얼마나 너른 물고기들의 삶터가 되어줄 것인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불러냈을 것인가. 그야말로 축만제의 또 다른 만석 풍경이 이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런데 항미정이 “서호는 항주의 미록같다”는 소동파 시구를 따서 지었다고? 우리네 지명이나 옛 건물 이름에 깃든 중국 영향이 좀 씁쓸하다. 하지만 풍경은 우리가 주인처럼 즐길 때 이름값을 더 하는 것. 항미정은 1908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건릉 다녀갈 때 쉬어간 정자로 회자되었는데, 명소의 이름값을 올린 셈이다.
축만제 인근에는 일제가 설치한 권업모범장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도 근처에 두었는데, 이 역시 중농의 맥을 잇는 근대농업의 실현이다. 그렇듯 농촌진흥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이었던 축만제는 농촌진흥청의 이전에 따라 위상이 조금 바뀌었다. 인근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서호공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서호천살리기(수원문화원에서 펼친 하천살리기운동)를 펴기 전에는 죽은 호수 같았다. 이곳을 지나던 시인의 눈에도 오염으로 부글거렸던 당시의 서호가 각인되었던지 암울하던 서호 모습을 그린 시편이 남아 있다.
악취 속에서도 대지는 여전히 풀꽃을 피우고
마디를 늘리고 있는 나뭇가지들
밤이면 어김없이 켜지는 불빛들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삼삼오오 희미한 불빛 아래 담소하던 이들은
날벌레들에게 기꺼이 피 몇 방울 나누어 주고
늦은 밤 손 흔들며 다리를 건넌다
칸칸이 매달린 몸을 끌며 어둠 속을 달린다
-박홍점, 「서호에서」 일부
지금은 서호가 다시 푸르러져 축조 때의 원대한 뜻을 일깨운다. ‘악취 속에서도 대지는 여전히 풀꽃을 피우’듯, 서호의 삶도 계속 힘을 내며 이어왔던 것이다. 근처의 아이들이 ‘아랑곳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온 싱싱한 활력에 힘입은 것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서호천살리기라는 인위적인 문화운동 후 하천에 대한 관심 속에 서호도 관리를 더 받은 덕이다. 물론 주변의 주민들도 서호 지키고 가꾸기를 계속해서 오늘의 푸른 호수를 유지하는 것이겠다.
◇둑방길, 축만제의 만석 추억
축만제는 너른 호수로 거느리는 항미정과 더불어 물빛도 최고지만 둑방길이 또 일품이다. 송창식의 노래 장면이 선명히 기억되는 둑방길. 휘어진 소나무들 몸짓과도 닮은 송창식 특유의 허수아비춤(?)에 국악 풍 노래가 둑방길의 멋을 한껏 돋웠던 것이다.
서호 하면 떠오르는 그림도 있는데, 바로 나혜석의 ‘수원 서호’(진위는 논란 중)다. 항미정에서 바라보는 서호 그림은 축만제의 풍격을 한층 그윽하게 해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인 나혜석은 수원 출신답게 수원8경에 대한 긍지가 높았으니 그가 그렸을 법하다. 최근에는 서호 사진전도 열었는데, 축만제에 담긴 만석 정신을 문화 예술적으로 견인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뿐이랴, 둑방길은 일기장에 적어둔 연애 비사(秘事)에도 많이 등장할 법하다. 그만큼 수원 시민들 추억도 풍성하게 해준 축만제 둑방길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일품길이다. 그렇게 돌아보니 축만제는 삶과 추억과 생명을 천년만년 지켜갈 만석의 호수가 아닌가. 여름날 드넓은 호수 보며 둑방길 걷고 향미정 오르는 맛이 참으로 푸르다.
정수자(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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