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 출신 루스 허버트의 아버지 칼 세이델은 24세의 나이에 부인과 딸, 태어난 지 몇 달 안된 아들을 남겨둔 채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로 떠났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였다. 미군 기록에 따르면 세이델 중위는1950년 12월7일 장진호 전투 도중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그 무렵, 어린 두 자녀를 돌보며 남편 소식을 기다리던 아내 로잔 세이델에게 남편이 전사했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몇 개월 뒤인 1951년 다시 날아온 전보에는 ‘세이델 중위는 전투 도중 미사일 공격을 받아 전사했고,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추가적인 소식이 전해지면 바로 알려주겠다’더니 그로부터 5년 뒤, 세이델 중위의 유해에 대한 미군 기록은 ‘회수 가능성 없음’으로 정정됐다.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20대 초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헤어진 로잔은 92세의 노인이 됐다. 딸 루스 허버트도 60세를 훌쩍 넘겼다. 두 모녀는 올해 초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지난 12일 북미 정상이 북측에 있는 미군 유해 송환에 전격 합의하자, 세이델의 뼈 한 조각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지난 23일(현지시간) 미 CNN 방송에 소개됐다. 허버트는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뜻도 알지도 못한 채 ‘한국(Korea)’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말도 배우기 전에 그 단어를 들었다. 한국은 내 삶의 일부와 같다”고 말했다.
북미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6·25 참전 미군 병사들의 유해 송환 절차가 본격화되고 있다. 미군 유해를 넘겨받기 위한 나무 상자 100여 개가 판문점으로 이송됐고, 유해를 미국으로 이송하기 위한 금속관 158개도 오산기지에 옮겨졌다. 북한에서 유해를 나무상자에 넣어 남쪽으로 반입하면 오산기지에서 하나하나씩 관에 넣는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번에 송환되는 미군 유해가 사상 최대 규모라지만 6·25 때 실종된 전체 미군 전사자 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전 참전 미군 가운데 7천697명이 실종 상태이며, 이중 5천300명 가량의 유해가 북측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미 양측은 유해 송환 이후 이들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미군 유해 송환은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을 구체적으로 이행하는 첫 행보다. 미군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도적인 사안으로 그 자체로도 의미가 깊다. 남과 북이 비무장지대에 묻힌 6·25 전사자 공동 유해발굴 문제를 논의한 만큼 이를 발전시켜 DMZ 유해발굴 작업을 남·북·미 군당국이 함께 진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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