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0. 중봉 조헌의 높은 뜻 서린 우저서원

임진년 왜구 침략 간파… 700인의 용사와 장렬한 최후

▲ IMG_3005
▲ 이만춘이 서원 건립을 상소, 인조의 윤허를 받아 1648년에 창건한 우저서원의 전경.
“이른바 천명이란 그윽하고 황홀한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삼가고 백성의 일을 힘써 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쓰임새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는 한 구절은 백성에게 임금 노릇하는 분으로써 제일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중봉집 권4>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의 한 구절이다. 1591년 3월, 도끼를 지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조헌은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우다 700의사와 함께 전사한 위대한 의병장이다.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고 싸웠던 곳은 충청도였지만, 김포에서 나고 자랐던 경기도 사람이다.

 

■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우저서원과 제90호 조헌선생유허추모비

김포시 감정동에 위치한 우저서원(牛渚書院)은 이만춘이 서원 건립을 상소하여 중봉 조헌이 나고 자란 옛 집터에 인조의 윤허를 받아 1648년에 창건한 서원이다. 1671년에 ‘우저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는데, 서원 주변에 소들이 물을 먹는 늪지가 있기 때문에 ‘우저’라는 이름을 얻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 서원중의 하나인 우저서원은 1972년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은 언덕을 3단의 평지로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한 단을 높인 곳에 자리 잡은 강당 여택당(麗澤堂)이 나타난다. 여택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강당 앞 좌우에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유생들이 예절과 학문을 익히던 강학공간이다. 서원의 뒤편에는 제향 공간 ‘문열사’가 있다. 조헌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청을 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서 매년 2월과 중봉의 기일(8월 18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 앞 왼편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있고, 그 아래 ‘조헌선생유허추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0호)가 서 있다. 서원이 창건되기 전인 1613년에 세운 이 추모비는 월사 이정구가 비문을 짓고 해서체의 글씨는 김현성이 썼다. 받침돌 위에 높이 142cm, 너비 62cm, 두께 26cm의 대리석 몸돌을 얹은 비좌원수(碑座圓首)의 형태를 갖춘 비문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과 중봉의 우국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우저서원에는 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행나무 대신 느티나무가 서 있다. 중봉의 스승 율곡의 위패를 모시는 자운서원에도 느티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연이 숨어 있지 않을까. 서원 앞에는 지금도 ‘우저’라는 이름을 갖게 작은 연못이 있는데, 칠월이라 푸른 연잎이 무성하다.

 

▲ IMG_3002
▲ 우저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외삼문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있는 여택당.
■후율정사를 짓고 후학을 기르며 병법을 연구하다

율곡보다 먼저 스승으로 모신 토정 이지함(1517~1578)의 권유로 조헌은 28세가 되던 해에 파주로 찾아가 율곡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때 우계 성혼도 스승으로 모셨다. 이들 중에서 율곡 이이(1536~1584)를 깊이 존경했다. 보은현감을 사임하고 옥천으로 낙향했을 때 조헌은 ‘율곡의 뒤를 잇는다’며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후율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1574년 겨울,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갔던 조헌이 돌아와 시무에 절실한 8조의 상소문을 올렸다. 중국의 제도를 먼저 인용한 다음 우리나라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언급하여 그 득실을 논하고, 오늘날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사관이 이런 평을 남겼다.

 

“조헌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뜻을 지녀 글을 읽거나 이치를 궁구할 때 현실에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율곡이 국방문제의 해박했던 것처럼 조헌도 병학에 밝았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575년 3월, 벼슬을 사직하면서 왜구를 물리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문집을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요청했던 일이다. “명나라 장수 척원경(戚元敬)은 사람됨이 공정하고 부지런하며 적을 물리쳤으니, 그의 문집을 비변사에 내려 출판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소서.”

 

그러나 선조는 이 말을 흘려들었다.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직후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막사를 찾은 선조는 이여송에게 평양성 전투의 승리가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의거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이 책의 가치를 깨달았다. 간곡한 요청에도 이여송이 국가의 비밀이라며 책을 보여주지 않자 선조는 역관들에게 상을 걸고 비밀리에 책을 입수했다. 서애 유성룡이 이 책을 바탕으로 훈련도감을 창설하여 삼수병을 육성하고, 속오군을 조직했으며, 훈련도감 낭청 한교가 이 책을 연구하여 <무예도보통지>의 바탕이 되는 <무예제보>를 편찬했다. <기효신서>는 <주자전서>만큼이나 조선 후기 사회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책이다. 아마도 조헌은 1774년에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연구하고 이런 상소를 올렸을 것이다.

▲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 700명과 조헌 선생의 우국정신을 담은 조헌선생유허추모비.
▲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 700명과 조헌 선생의 우국정신을 담은 조헌선생유허추모비.

■ 700명의 용사와 결전을 벌이다

1591년에 도요토미가 승려 현소를 보내 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소식을 들은 조헌이 도끼를 메고 상소를 올려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했다. 상소를 본 선조는 “조헌이 여러 차례 미치고 망령된 소를 올려 귀양살이까지 했었는데도 오히려 그칠 줄을 모르니 참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라며 비난했다.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명을 기다리던 조헌은 회답이 없자 머리를 주춧돌에 부딪쳐 피를 쏟았다. 누군가 조헌의 과격한 행동을 책망하자 “명년에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을 때는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리라.”고 대답했다. 조헌은 왜적이 영남으로 침략할 것이라며, 영남에서 적을 방비할 대책과 변경의 장수와 고을의 수령 및 충신 의사로서 쓸 만한 사람을 거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언급한 사람들은 임란 당시 거의 모두 전공을 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1591년 가을, 조헌은 김포에 있는 선영을 찾아 성묘하고 통곡했다. 이웃들이 까닭을 물으면 “명년에는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이니 이 뒤에 서로 보기는 어렵겠다.”고 대답했다. 소식을 들은 집안 어른이 찾아와 꾸짖었다. “자네가 대궐 앞에서 거적을 깔고 도끼를 가지고 대죄하면서 명년에 병란이 일어난다고 말한 것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이가 많은데, 지금 어찌 망령된 일을 하여 고을 사람들을 경동시키는가?” “우러러 천문을 살펴보니, 명년의 병란은 우리나라가 생겨난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큰 변란입니다. 원컨대 아저씨는 내 말을 망령되다고 하시지 말고 미리 피난할 계획이나 하시오.” 조헌이 예측했던 대로 한 해가 지난 임진년에 전쟁이 일어났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7월, 병력을 나누어 이웃 고을을 돌며 군사를 모으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왜적이 청주성을 점령했으며, 승장 영규가 홀로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조헌이 군대를 이끌고 청주로 향했다. 8월 1일, 조헌은 승장 영규의 승군과 연합하여 적진을 공격했다. 버티던 적이 이날 밤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드디어 청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잠시 뿐,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카와의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 전공을 시기하던 관군이 의병들의 가족을 잡아가두고 협박하여 많은 병력이 흩어졌다. 

조헌은 부하들을 매로 다스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을 잘 들었다고 한다. 관군의 방해를 받았을 때도 대장을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이렇게 남은 용사가 700인이다. 8월 18일, 전투를 앞둔 조헌이 입을 열었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함께 죽기로 맹세한 용사들은 중과부적의 적병을 세 차례나 물리쳤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왜적이 거침없이 장막으로 뛰어 들어왔다. 막하의 사병이 피하기를 청하자 조헌이 웃으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며 기둥을 잡고 싸움을 독려했다. 이 전투에서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700인 모두가 전사했다.

 

금산전투는 비록 패배한 전투였으나 결과는 승리였다. 금산에 있던 적군이 무주에 있던 적과 함께 모두 퇴각하여 충청도와 전라도가 이 전투로 인하여 안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산전투의 패보가 전해지자 “미천한 하인들도 모두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포시는 중봉 조헌의 충절과 높은 뜻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조헌을 널리 알리기에 정성을 쏟고 있는 (사)중봉조헌선생선양회의 노력으로 중봉의 문집이 곧 완간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