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욕’ 멀리한 선비… 학문과 도덕의 표상
시호라든가 관직이라든가 하는 화려한 수식이 없다. 그냥 본관과 성명이 전부다. 성혼(成渾)의 본관은 묘비에 적은 대로 창녕(昌寧)이다.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묘비는 간략했다. 간략한 묘비는 성혼 스스로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성혼은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이 쓴 묘지(墓誌)를 남겼다.
묘지는 무덤에 넣는 글이다. 여기서 자신의 묘비에는 오직 다섯 자만 적으라고 했다. 묘 앞에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라는 다섯 글자만을 비석에 새겨 넣어, 자손들이 무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의 성품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로 겸손함이다.
성혼의 묘 아래쪽에는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의 묘이다.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묘도 나란히 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있다. 청송선생(聽松先生)이라 불린다는 내용의 졸기는 그의 아버지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의 졸기 말미에 성혼도 소개하고 있다. “아들 성혼은 가훈을 받아 선친의 뜻을 잘 이었고 학문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았다. 효행도 있어 바야흐로 행의(行義)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성혼은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대에 활동하다, 1598년(선조 31)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원래 서울 순화방(順和坊: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다. 파주에는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와 거주하게 되었다. 성혼은 여기서 성장하고, 우계라는 호도 얻었다.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 이이(1536~1584)도 한 고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살 차이로 한 동네 친구였던 것이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백인걸과 아버지 성수침은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은 모두 퇴계 이황을 존경했다. 이이는 이황을 찾아가 한번 만난 후 스승으로 여겼다. 성혼 또한 이황을 존경했다. 그의 문집 <우계집>의 첫 내용이 바로 퇴계 이황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년(1569)에 이황이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해 하는 시였다.
어려서 출중했던 두 사람은 이기론, 인심도심론, 사단칠정론 등 성리학의 주요 문제에 대해 학술토론을 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을 잇는 것이었다. 경상도에 사는 이황은 전라도에 사는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성리학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황은 나이가 훨씬 적은 기대승과 진지한 학술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었던 것이다.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성혼이 묻고 이이가 답하면서, 이이는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었다. 성혼은 이황의 편에서 이황과 이이의 이론을 절충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을 이어 조선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성혼은 벼슬에 나가는 것을 썩 즐기진 않았다. 관직에 나아갔다가도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돌아오곤 했다. 오히려 후진을 양성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조헌과 김덕령,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와 김자점 등도 성혼의 제자였다. 제자이자 사위였던 윤황의 아들·손자가 바로 윤선거·윤증 부자이다. 그밖에 황신, 신흠, 정엽, 안방준, 강항, 최기남 등의 제자가 있다. 제자 가운데는 이이의 제자와 중복되기도 했다. 우계학파를 넓게 잡으면, 장유, 최명길, 박세당, 조익 등도 포함된다.
실록에는 평생의 벗이자 학문 파트너였던 이이가 성혼을 평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만약 견해(見解)의 우월을 논하자면 내가 약간 나을 것이나, 행실의 돈독함과 확고함은 내가 따르지 못한다.” 논리는 접어두고, 선비로서의 면모를 인정해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혼의 글을 보면 매우 겸손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색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선조실록>에 보면, 죽었다는 사실만 기재한 후 부정적 평가를 약간 덧붙였다. 첫째, 일찍이 은사(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功名)에 빠졌다는 지적이다. 지적이 다분히 악의적이다. 둘째, 기축옥사의 일을 거론하고 있다. 여러 사람을 구하지 않았으며, 특히 최영경(崔永慶)의 죽음도 그대로 보기만 하고 구해주지 않았다며 정철과 함께 나쁜 짓을 하여 모두 미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축년(1589) 정여립의 옥사 때 정철이 주동이 되어 많은 동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때 정인홍은 동문수학한 최영경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에 미온적인 성혼에 대해 감정이 나빠졌다. 실제로는 성혼이 최영경을 구원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성혼에게 공격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후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은 동인의 한 갈래였는데, 성혼을 적대시했다. 그리고 이는 이귀와 같은 성혼의 제자가 정인홍을 적대시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선조실록>에서 성혼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은 실록을 북인이 중심이 되어 편찬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러한 실록에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성혼의 졸기를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기술해 놓았다. 고매한 성품을 지녔다는 점, 이황을 존경하고 사숙했다는 점, 이이와의 학술토론을 통해 성리학에 관해 밝힌 바가 많았다는 점 등을 소개했다. 그런데 여기에 선조 임금의 후대가 두터웠으나 임진왜란 때 이홍로의 모함으로 시들해졌다는 점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일생에서 두 가지가 문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기축옥사 때의 처신과 임진왜란 때의 처신이다.
혜음로 길가에 쌍미륵불 용암사가 있었다. 잠시 주차하고 절에 들어가보았다. 그 안에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었다. 불상을 거대한 바위에 자연스럽게 조각해 놓았다. 특이한 게 불상이 둘이었다. 두 불상이 나란히 있는 게 정겹다는 느낌도 들었다. 78번 도로를 따라 좀더 놀라가니 윤관 장군의 묘역이 나왔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도 고려시대 불상이요, 윤관도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서울에서 의주로를 따라 가면 먼저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지나게 된다. 두 왕조의 도읍 사이에 있는 도로인데도 실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남북 분단의 접경지역에 가까워서일 것이다.
성혼묘역에서 우계로로 나와 북쪽으로 더 나아가니 임진각이 나왔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 이 길을 갔을 것이다. 선조가 파주를 지나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성혼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이홍로가 가까운 마을을 가리켰다. 선조가 나와보지도 않는 성혼에 대해 괘씸하게 생각해서, 이후로 그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나중에 후대 문인들이 그를 문묘에 배향하려 했을 때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때 반대 명분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당시 성혼의 마을은 좀더 떨어진 곳이었고, 성혼은 집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관계에 따라 매우 억울한 누명일 수 있는 것이다.
임진각에서 북쪽을 바라보다 자유로를 통해 한강을 바라보며 귀가했다. 분단의 상황이 개성과 서울 사이의 오랜 역사를 압도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분단의 상황은 잠깐이요, 개성과 서울 사이의 역사는 언제 그랬느냐 하는 거처럼 복원되리라 기대해 본다. 그렇게 되면 성호선생 묘역의 주변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성혼에 대한 평가는 당쟁에 휘둘린 경향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성실하고 독선적이지 않았다. 관리로 나아가서도 권력욕에 빠지지 않고, 늘 처사로서의 겸덕을 갖추었다. 성혼은 조선 중기 선비의 전형이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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