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판사의 힘

원고는 암보험에 가입한 보험가입자였다. 매달 2만9천원씩 납부했고 가입금액은 2천만원이었다. 1995년 수원의 한 병원에서 자궁경부0기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계약 내용에 따라 암진단급여보험금 1천만원, 암수술급여보험금 400만원, 9일간의 암입원보험금 180만원 등 1천580만원을 청구했다. 하지만 보험사는 한 푼도 줄 수 없다며 돈 지급을 거부했다. 원고가 보험사의 횡포라 규정했고, 법원에 정식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1996년 10월 29일, 수원지법에서 판결이 나왔다. “원고(보험가입자)의 청구를 기각한다.” 돈을 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보험사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가입자를 우롱하는 계약, 보험금 지급 거부 등이 지탄을 받고 있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했다면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결과는 거꾸로 나왔다. 분명히 ‘암’이라고 부르면서도 암보험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 출입기자 시절 단독 취재였다. 보도 전 담당 판사를 찾아갔다. 그때 들었던 설명이 이랬다. “나도 가입자에게 승소판결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법이 그렇게 돼 있으니 방법이 없다”. 자궁경부0기암은 보험계약상 보험금지급 사유인 암(의학적 표준질병분류상 악성신생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고 했다. 세계 보건기구의 질병 기준까지 검토했지만 가입자를 보호할 근거는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판결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기자가 주목했던 건 담당 판사다. 방희선 판사가 내린 판결이다. 방 판사는 당시 법원 내에서 대표적 진보 성향 판사였다. 시국사범에 대한 영장을 무더기로 기각했다. 영장 기각 이후 시국사범을 즉시 석방하지 않은 경찰관을 직접 고발했다. 그랬던 방 판사였기에 ‘보험사 승소’ 판결이 더 어색해 보였다. 그때 방 판사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자궁경부0기암과 관련된) 법을 고칠 필요가 있다.” 그 법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 옳았을까. 보험사에 대한 사회적 불신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0기암’도 암이라고 믿은 가입자들은 선량한 피해자다.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해 줘야 한다. 반면, 보험금 지급은 계약 내용과 의학적 정의에 따라야 한다. 그 결과가 ‘0기암’은 암이 아니라고 정의된다. “보험금을 지급할 필요 없다”고 판결해 줘야 한다. 방 판사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면서 ‘법을 고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판사 힘도 법률 밑에 있음을 그때 알았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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