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시간 적폐 수사로 ‘비리기업’
핵심 혐의 무죄… 18조 수주 탈락
기업·정부, 설명도 책임도 ‘침묵’
검찰 수사는 셌다. 압수수색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그사이 ‘설’이 ‘진실’로 굳어갔다. 원가조작을 통한 개발비 편취설이 기정사실이 됐고, 천문학적 분식회계가 이뤄졌다는 검찰 발표까지 나왔다. 분식회계가 뭔가. 법원에서 확정되면 해당 기업은 상장을 폐지해야 할 중죄(重罪)다. 여기에 경찰도 가세했다. KAI 본사를 또 한 번 수색했다. 검찰 건과는 다른 비리가 포착됐다고 설명했다. 9월21일, 결국 KAI 부사장이 자살한다.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 업계는 다 안다. 전쟁 중이었다. 항공 산업의 미래가 걸린 전쟁이었다. 타깃은 미국이 던진 초대형 입찰이었다. 공군 훈련기를 30년 만에 교체하는 사업이다. 교체 비행기만 350대다. 20조 원 짜리다. 이 세기의 입찰전을 펴던 게 바로 KAI다. 미국 록히드마틴사와 한 조(組)였다. 그해 7~10월이면 입찰 서류가 접수돼 채점이 매겨지던 때다. 하필 그때 적폐 잡도리가 시작됐다. 발주국에서 어찌 봤을까.
그 결과가 나왔다. 지난 9월28일 새벽이다. ‘美 훈련기 교체 사업자, 보잉사로 선정’. 업계 충격이 크다. 록히드마틴은 미국 방산업계에 절대 강자다. KAI의 T-50 훈련기는 수출까지 한 검증품이다. 보잉은 군 훈련기를 만든 적도 없다. 여기에 믿는 구석이 또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원이다. 트럼프를 다섯 번 만났다. 마지막 만남은 결정 사흘 전이었다.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들 이길 거라고 했다. 그런데 졌다.
실망이 여간 아니다. 사업비 수조원은 차라리 일부다. 협업을 통해 얻어내려던 항공기술이 컸다. 이 기회가 사라졌다. 향후 세계 훈련기 교체 시장만 100조 원에 육박한다. 이 동력이 사라졌다. 파급 효과를 기대했던 국내 관련 업체만 수백 개다. 이 일거리가 사라졌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이라크에 3조 원 어치나 팔던 T-50이다. 이 수출길이 사라질 판이다. 미국에서 퇴짜 맞은 비행기다. 어떤 나라가 돈 주고 사가겠나.
조용하다. 이 지경이 됐어도 나라가 조용하다. KAI 사장은 입장문 한 장 던지고 안 보인다. ‘저가 입찰’ 핑계만 줄줄이 적어놨다. 정부도 안 보인다. 어떤 부처 하나 나서 설명하지 않는다. 지난해 6월에만 해도 이렇게 공치사하던 정부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 전투기를 더 살 테니 KAI를 선택해달라’고 요청했다.” 업계만 답답하다. 서운함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척만 한 거 같다.’
여기서 9년 전 어느 대통령 얘기를 해보자. UAE가 발주한 47조 원짜리 원전 입찰이 있었다. 결정을 앞두고 대통령이 현지로 날아갔다. 그리고 9시 뉴스에 직접 출연했다. ‘우리가 원전 공사를 따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눈살을 찌푸린 이들이 많다. ‘대통령이 유난 떤다’고 봤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그날 밤 한국은 47조 원짜리 수주에 성공했다. 그리고 9년 뒤 9월28일 새벽, 한국은 18조 원짜리 수주에 실패했다.
감옥 간 사람과 견준다고 언짢아할 것 없다. 문 정부 출범 이후 ‘KAI 1년’은 비교되어 마땅하다. 하필 수주 전쟁 한창일 때 기업을 털었다. 정경 유착 회사, 분식회계 회사, 부사장 자살 회사로 세계 언론 앞에 망신을 줬다-그나마 핵심 혐의 대부분은 1심 무죄다-. 대통령 측근이라는 사장은 경쟁사 응찰가를 어림잡지도 못했다. 했다는 정부 지원도 실체가 없다. 이러니 ‘유난 떨던 前 대통령’까지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청년 실업 해소? 이 순간에도 항공학 배우고, 기계학 배우는 청년들이 많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한다. 날개 만들고, 엔진 만드는 청년들도 많다. 판교에서 일하고, 용인에서 일한다. 이들에게 9월28일은 절망일로 기록됐을 것이다. 20년치 먹거리를 놓친 날로 기록됐을 것이다. 이들에게 뭐라고 할 건가. 할 말이 있나. 혹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자고 할 건가. 다음 미국 훈련기 교체는 30년 뒤에나 올 텐데….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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