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7일 새벽(한국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 골프장.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여자오픈 연장전 마지막 18번 홀에서 박세리가 드라이버샷을 날렸다. 공이 연못쪽으로 굴러가 경사가 심한 잡초 속에 묻혔다. 박세리는 잠시 망설이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착하게 공을 안전한 쪽으로 빼냈다. 박세리는 이 ‘맨발 샷’으로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 정상에 올랐고,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앞서 열린 맥도날드 챔피언십에서 LPGA 첫 우승을 했던 박세리는 그해에만 4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은 한국 여자골프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박세리 이후 많은 선수들이 “나도 박세리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LPGA 문을 두드렸다. 박세리를 롤모델로 하는 선수들에게 ‘세리키즈’라는 별칭이 붙었다. 세리키즈의 활약은 눈 부셨다. 1998년 박세리부터 지난달 14일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전인지까지, 한국 선수들은 LPGA 우승 트로피를 169번이나 들어올렸다. 지난 21년간 박세리와 세리키즈가 벌어들인 누적 상금이 약 2억448만 달러(약 2천321억 원)에 달한다.
골프에 ‘세리 키즈’가 있다면 피겨스케이팅엔 ‘연아 키즈’가 있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며 피겨에 입문한 선수들이다. ‘연아 키즈’ 임은수(15)가 1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5차 대회 여자 싱글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피겨가 김연아 이후 9년 만에 그랑프리 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이다. 2014년 ‘피겨 여왕’ 김연아 은퇴 이후 한동안 조용했던 피겨계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임은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예닐곱 살 때 연아 언니의 경기를 TV에서 보고 반했다. 연아 언니의 반짝이는 의상이 눈에 들어왔고 피겨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은수의 점프는 시원시원하다. 김연아처럼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도 잘 한다. 어리지만 다양한 표정 연기도 일품이다. 임은수의 가능성을 본 김연아가 틈날 때마다 조언과 지도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에 임은수가 있다면 남자는 차준환(17)이 있다. 시니어 무대 데뷔 1년 조금 넘은 차준환은 지난달과 이달 열린 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2차·3차 대회에서 연달아 동메달을 따냈다. 차준환의 상승세는 무서울 정도다.
무럭무럭 자라난 연아 키즈의 목표는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메달이다. 나이가 어린 만큼 성장 가능성도 무궁한 연아 키즈들이 한국 피겨의 미래를 밝게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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