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해방주의자/ 신여성 나혜석은/ 용산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샀다//
기차는 40㎞의 속도로 평양을 지나/ 신의주/ 압록강 건너/ 옛 부여의 수도 창춘/ 시베리아 평원을 거쳐 페테르부르크/ 베를린 그리고, 파리/ 파리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였다//
용산역 매표 창구에서/ ‘파리’라고 말하는 그녀의/ 입 모양을 상상하면서 나도 입술을 붙였다 벌리며/ 툭 뱉어 본다/ ‘파리’// -후략-
조영옥의 시 ‘파리 나혜석’의 일부다. 수원 출신의 한국 최초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은 31살이던 1927년 용산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샀다. 평범한 어머니이길 거부하고 불꽃같은 삶을 산 그녀는 ‘철의 실크로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에 도착,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두루 여행한다.
1936년 마라토너 손기정도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해 올림픽에 참가했다. 부산에서 열차를 탄 그는 경성-평양-신의주를 거치고 만주를 지나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당시만 해도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기차로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정’의 이광수도,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도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고 그곳 풍광을 소설에 담아냈다.
유라시아대륙으로 이어졌던 남북의 철길은 한국전쟁으로 끊겼다. 경의선도 경원선도 두동강이 났다. 철도종단점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지판이 세워졌고, 열차는 허리 잘린 한반도의 남단에 섬처럼 갇혔다. 그동안 남북 철길을 잇자는 합의가 있었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지난 30일 ‘서울↔신의주’를 새긴 남측 열차가 북녘땅을 향해 기적을 울리며 군사분계선(MDL) 인근 도라산역을 출발했다. 북측 철도 구간 남북 공동조사를 위해서다. 남측 도라산역과 북측 판문역을 주 5회 오가던 화물열차 운행이 중단된 2008년 11월28일 이후 10년 만이다.
17일까지 진행되는 조사는 개성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경의선 400㎞ 구간, 금강산에서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800㎞ 구간에서 이뤄진다. 북측 철도의 노후화, 문제점을 살펴보게 된다. 현재 북한 철도는 노반과 레일 등 기반시설이 노후화했고 관리가 안돼 시속 40㎞ 정도 저속 운행만 가능하다.
철도 공동조사가 남북의 철길을 하나로 이어 평화 협력은 물론 경제 번영의 혈맥을 뚫는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철길을 잇는 것은 분단된 남과 북을 연결하는 의미 그 이상이다. 한반도 남단에 갇혀있던 우리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연결시켜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나혜석, 손기정처럼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횡단열차 타고 유럽 갈 날도 멀지 않았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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