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달력은 큰 선물이었다. 대표적인 경조사 답례품이기도 했다. 집안의 벽은 달력이 장식했다. 멋진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간 12장짜리 달력이 붙기도 했고,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이 걸리기도 했다. 국회의원 얼굴을 중심으로 12달이 모두 들어간 한 장짜리 달력이 붙여질 때도 있었다. 어떤 집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 사진이, 어떤 가게에는 비키니를 입은 여배우 사진이 실린 달력이 걸렸다.
달력에는 생일과 제사 등 집안의 기념일이 표시됐다. 이웃집의 잔칫날이 표시되기도 했고, 곗날이나 공과금 수납일이 적히기도 했다. 종이가 귀했던 때라 달력은 다 쓴 다음에도 유용했다. 비교적 두툼한 12장짜리는 교과서 덮개로 썼다. 때때로 윷놀이나 장기 판을 그리기도 했고, 만두나 칼국수를 만들 때는 바닥에 깔고 밀가루 반죽을 밀었다. 주로 귀금속점에서 만들던 일력은 얇아서 화장실 휴지로 쓰기에 적당했다.
한때 기업 홍보용으로 적극 활용되면서 연말이면 달력이 넘쳤다. 은행에 가면 고객들에게 그냥 몇 개씩 나눠주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전통적인 벽걸이보다 탁상용 소형 달력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요즘엔 이 마저도 잘 만들지 않아 달력 구하기가 쉽지 않다. 연말 달력인심은 옛말이다.
달력이 사라진 것은 스마트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중장년층도 대부분의 일정을 스마트폰으로 관리한다. 그래서 탁상용 소형 달력이면 모를까, 벽에 거는 큰 달력을 구하려는 이가 별로 없다. 선물용으로 제작해왔던 기업들도 이젠 대량으로 달력을 만들지 않는다. 달력 말고도 기업 홍보수단이 다양해진 데다 비용절감 등의 이유 때문이다.
공짜 달력이 줄면서 온라인 등을 통해 달력을 직접 사서 쓰는 사람들이 늘었다. 온라인 쇼핑사이트 G마켓은 지난달 13일부터 이달 12일까지 최근 한 달 동안 달력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했다고 밝혔다. 가장 일반적인 벽걸이 달력 판매량이 29% 늘었다. 매일 사용할 돈과 영수증 등을 관리할 수 있게 만든 생활비 달력도 93% 증가했다. 달력을 하나의 인테리어 요소로 보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사서 쓰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 가족사진이나 원하는 그림 등을 넣어 제작할 수 있는 DIY 달력은 매출이 70%, 개인 일정 관리에 편리한 탁상용 달력은 6% 증가했다.
많은 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한 해 계획을 세우고, 새 결심을 다진다. 종이 달력의 퇴조는 디지털시대의 자연스런 현상이겠지만 새 달력을 보며 갖던 꿈과 희망은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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