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기부 한파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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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에는 해마다 연말이면 수천만원을 놓고 가는 기부자가 있다. 2000년 58만4천원을 시작으로 금액이 꾸준히 늘어 지난해에는 6천27만9천210원을 기부했다. 그동안 기부액이 5억813만8천810원에 달한다. 돈을 놓고간 이는 정체를 철저하게 숨겨 ‘얼굴 없는 천사’란 별명이 붙었다. 처음엔 초등학생을 시켜 돼지저금통을 주민센터에 전달했고, 다음해부터는 각기 다른 사람이 전화를 해서 “○○에 돈을 놓아뒀으니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연말이면 전국 곳곳에 이런 얼굴 없는 천사들이 나타난다. 충북 제천에선 어떤 이가 17년간 매년 연탄 1만~2만장을 기부하고, 경기도 파주와 광주광역시에선 1t 트럭을 몰고 와 쌀 수백㎏을 놔두고 사라지는 이가 있다. 경남 합천에는 2015년부터 우체통에 현금 수십만~수백만원과 메모가 담긴 봉투를 넣는 ‘우체통 천사’도 있다.

이런 익명의 기부자들도 있지만 기부가 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올해는 ‘기부 한파’가 매섭다. 연말연시는 기부의 계절이라지만 예년과 달리 싸늘한 분위기다.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관리하는 ‘사랑의 온도탑’은 수은주가 얼어붙은 듯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까지의 모금액은 내년 1월 말까지 목표액의 36.7%인 1천508억원에 그쳤다. 작년 같은 기간 모금액의 85% 선이다. 경기도공동모금회도 올해 모금 목표액이 316억800만원이지만 기부 민심이 얼어붙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손길도 줄었고, 취약계층에 연탄 지원을 하는 ‘연탄은행’도 예전 같지 않다.

이는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기부활동이 위축된데다 각종 기부금 비리로 불신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불우아동을 위한 기부금 128억원을 유용한 ‘새희망씨앗’ 사건, 딸의 희소병 치료를 도와달라며 모은 후원금 12억원을 챙겨 엉뚱한 곳에 탕진한 ‘이영학 사건’ 등이 심각한 기부 불신을 낳았다. 이런 부정적 인식에 ‘기부 포비아(phobia·공포증)’란 말까지 생겼다. 지난해 국민기부 참여율이 2010년 이후 최저치인 26.7%로 뚝 떨어졌다는 통계 역시 ‘기부에 인색해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기부 불신으로 인해 기업이나 시민들의 나눔 문화가 식어선 안된다. ‘기부 한파’가 불신에서 비롯된 만큼 기부금 관련 조직의 신뢰를 담보할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깜깜이’로 불리는 모금단체들의 회계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기부는 남을 행복하게 하지만 자신도 행복해진다. 따뜻한 기부문화가 살아나 사랑의 온기가 전국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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