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삶의 질을 높이려면

얼마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인구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면서 ‘모든 세대의 삶의 질 향상’을 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기존의 출산장려 정책은 국가가 출산을 주도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크게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것이 사실 모호하기만 하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보도 자료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기존의 정책들을 재구조화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의 세부 정책들은 여전히 ‘그 나물에 그 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반적으로 삶의 질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풍요로워만 가능하리라 생각하기 쉽다. 예컨대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와 같은 절대적 빈곤함의 상태 혹은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이나 아프리카 국가에서 삶의 질을 거론한다는 것은 너무 안이하고 배부른 소리 같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풍요가 삶의 질을 보장하는 핵심적인 요소도 아닌 것 같다. 2017년 통계청에 발표한 국민 삶의 질 종합지수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2006년에서 2015년 사이의 일 인당 GDP는 28.6% 증가했지만, 2015년 국민 삶의 종합지수는 2006년보다 11.8% 증가했을 뿐이다.

 

2016년 OECD가 발표한 삶의 질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OECD 38개국 중 28위를 차지했다.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보다는 못하다. 특히 ‘환경’과 ‘일과 삶의 균형’, ‘공동체’ 부문에서 최하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올겨울 ‘삼한사미’로 대변되는 겨울철 미세먼지의 고통, 출산율과 노인 빈곤율 및 아동 삶 만족도 꼴찌, 자살률과 산업재해율 최고, 중산층 몰락과 양극화 현상,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바닥으로 내몰리는 비정규직 젊은이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세대가 지금 질 좋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특히 젊은이들과 저소득층에게 대한민국은 여전히 헬조선이다. 헬조선이란 용어는 이들의 삶의 질 체감도가 바닥에 떨어져 있음을 단적으로 표상한다. 또한 며칠 전에 일어난 김용균 청년의 검은 죽음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더구나 “그런 곳인 줄 알았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어요. 저는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는 그의 어머니의 외침은 우리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저리게 만든다.

아무리 경제적 풍요로움이 주어진다 해도, 경제적 풍요 이면의 그림자에 밝은 빛이 비치지 않는다면 삶의 질을 높인다는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릴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공감, 그들의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 확립을 통해 ‘포용’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국민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김연권 경기대 다문화교육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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