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3월 초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의 초실세가 제13대 00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당사자는 즉각 “민정당 깃발 아래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니 상대방 대답이 가히 놀라울 정도다. “각하께서도 민정당 깃발을 내리고 싶다”고 했다. “그럼 민정당 깃발을 내리게 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까요?”라고 하니, 한 번 해보자고 부탁을 했다.
드디어 4ㆍ26 총선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졌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대약진을 하여 원내 2당이 된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3위에 그쳤다. 88년 6월 말 통일민주당 의원 몇몇을 만나보니 제3당으로서의 피곤함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불만을 토로했다. 여기서 전광석화와 같이 스쳐 지나가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어쩌면 민정당 깃발을 아무런 저항 없이 내리게 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확신(?)감이 왔다.
사무실에 돌아와 3당 합당의 초안을 작성하여 그 당시 모시고 있던 yㆍy님께 1차 보고를 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나서 그 울트라 실세와 상의해 보라는 말씀이 있었다. 88년 무더운 여름에 나는 전방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중간평가(中間評價)에 대해 논하다가 차츰 본론으로 들어갔다. 3당 합당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 후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들고 만나기를 수도 없이 시도했다. 드디어 울트라 실세가 노태우 대통령께 보고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
처음에는 3당 합당에 대해 극소수 인원 8인 이내에게만 알리고 극비리에 추진했다. 절대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정호용 장군과 노태우 대통령 간의 죽마고우 관계가 깨져 아직도 화해하지 않고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유인 즉, 정호용 자신에게 “노태우가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널리 알려가면서 이 일, 즉 3당 합당을 추진했다면 당연히 실패했을 것이다.
3당 합당의 숨은 뜻은 군정 종식에 있다. 이 나라에서 군부 정치를 종식시키는 데 군부 출신 대통령 노태우가 나선 것은, 의로운 명예혁명에 해당하는 일대사건(一大事件)이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고작 박철언을 내세워 3당 합당을 했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말았다. 3당 합당을 정치적 야합 정도로 치부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일주일 후면 3당 합당 29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30주년이 되는 2020년에는 각종 학술세미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력이나마 3당 합당이 역사(歷史)에 제대로 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감히 펜을 들었다.
김진후 고구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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