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말모이’와 광제원 축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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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영화 <말모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어 말살정책의 만행과 그에 맞서 우리글 우리말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을 접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

1929년 조선어학회회원들이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조직해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려고 했다. 이를 막기 위하여 일제는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하고, 조선어학회 간부를 비롯한 사전 편찬과 관련이 있는 모든 이들을 검거하였다.

마침내 함경도 함흥재판소에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져 이희승, 최현배 선생 등 열한 분에게 징역을 선고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선어학회 수난사건’이다.

민족의식을 드높이고자 신교육에 앞장서서 애국계몽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던 애국계몽신문 <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22일자 보도에 따르면, 당시 광제원의 일본인 고문관 의사 좌좌목(佐佐木)이 사전예고 없이 갑자기 서양의학시험을 치는 비열한 방법을 써서 광제원에 근무하던 한의사들을 쫓아낸 것을 일제의 민족의학에 대한 탄압책으로 보고 그 부당함을 비판한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광제원 축출사건’이다.

광제원은 대한제국의 관립병원으로서, 1907년에 관립의학교와 부속병원, 대한적십자병원의 기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의원으로 개칭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행정권을 장악한 일본통감부의 압력으로 광제원에서 한의사들을 축출한 것은 이미 계획된 한의학에 대한 탄압책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인 의사가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7월에는 일본인 의사 좌좌목이 관제에도 없는 의사장이라는 신분으로 간섭을 가해 한의학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후에 대한의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진료를 개시한 1908년 10월 24일 개원식에는 한의사가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한의학 말살책동은 더욱 기승을 부려 양의사들은 의사로, 한의사들은 의료기사 수준의 의생으로 격하시켜버렸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1944년에는 의생제도마저 폐지하여, 한의사제도가 제도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899년 3월 관립의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인 1900년 1월 의사규칙을 제정 반포하여, 대한제국에서 근대적 면허제도를 적용할 의사는 한의학을 수행하는 한의사를 위주로 서양의학을 보완적으로 수용하는 근대적 통합의사제도를 꿈꾸던 고종황제의 꿈이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매우 의미가 깊다. 강제로 쫓겨난 한의사들 개개인의 좌절감도 좌절감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적 좌절감도 컸을 것이다.

한의사들이 공공의료부문에서 밀려난 ‘광제원 축출사건’은 ‘조선어학회 수난사건’과 오버랩되어, 일제강점기라는 길고 지루한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했던 한의학과 한민족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윤성찬 경기도한의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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