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8일 정기국회 시정(施政)연설에서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박근혜 정부 때에는 한국을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라고 표현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인 2018년에도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협력관계를 심화시킨다”는 언급이 있었다.
올해 시정연설에서 한일 관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었던 것은 위안부 재단 해체, 우리 대법원의 일제 징용공 배상 판결과 자위대 초계기에 대한 레이더 겨냥 논란 등으로 양국관계가 악화한 것이 배경으로 보인다. 29일 아사히 신문도 이렇게 된 데에는 ‘한국이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깔렸다고 보도했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보에서는 지난 1월 9일자 ‘위기의 한일 관계,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일본과의 관계는 국민감정과 정치적 목적을 떠나 냉철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일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끝없는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은 “미국과의 관계가 굳건하고,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도 호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게 아베 내각의 내부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과 러시아,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공격에 대한 요격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에 최신 레이더 배치를 추진하고 있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28일 보도했다.
최근 한·미 동맹은 ‘주한미군 감축설’이 나올 정도로 위태롭지만, 미·일 동맹은 미사일 방어 신형 레이더의 일본 배치가 검토될 정도로 굳건하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앞에 둔 우리는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ICBM을 폐기하면 미국은 북핵을 현상 유지 선에서 적당히 타협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 우려는 이미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궁극적으론 미국 국민의 안전이 목표”라고 말할 때 예고됐다. 결국 ‘핵 보유 국가’ 북한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직면한 꼴이다. 이런 판국에 외교·안보적으로 중요한 일본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갈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명약관화(明若觀火)다.
외교가에선 아베 총리가 ‘한국 패싱’과 동시에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 의지를 보인 것은 비핵화 논의에서 소외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우리를 무시함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전략에 무응답으로 일관할 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 우리와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 안의 일본 전문가들을 몰아내고 있으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나라는 백척간두에 있는데 이를 해결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없으니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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