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존엄사법 시행 1년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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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8일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도 좋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존엄사(尊嚴死)’가 법적으로 인정된 국내 첫 사례다. 8개월 동안 식물인간 상태였던 김모 할머니(76) 자녀들이 대학병원을 상대로 ‘어머니 뜻에 따라 자연스러운 사망을 위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재판부는 “병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판결 후 병원은 김 할머니에게 인공호흡기 대신 인공 영양ㆍ수액만 공급했다. 할머니는 201일간 자가호흡을 하며 생존하다가 2010년 1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이를 계기로 존엄사 논의가 본격화됐고, 지난해 2월 4일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이 시행됐다.

불필요한 연명 의료를 중단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자기결정권을 부여한 ‘존엄사법’이 도입된 지 1년이 지났다. 법 시행 후 연명 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환자가 3만5천여 명에 이른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는 11만4천여 명이다. 의향서는 나중에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을 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서류다. 19세 이상이면 건강한 사람도 지정 등록기관을 통해 미리 작성할 수 있다.

연명 의료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부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하는 행위다. 존엄사법 시행 이전엔 인공호흡기를 달고 심장 박동만 유지되게 하는 등의 무의미한 연명 치료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컸다. 법 시행 이후엔 ‘편안한 죽음’ ‘자연스러운 죽음’ 등 품위있게 삶을 마무리하는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존엄사를 바라보는 시민 인식이 달라졌고 임종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3월 28일부터 시행되는 존엄사법 개정안은 의식없는 환자의 연명 의료를 중단할 때 동의 받아야 하는 가족을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전원’에서 ‘배우자와 1촌 이내 직계 존·비속’으로 축소했다. 지금은 배우자와 자녀·손주·증손주 등 모든 직계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앞으로는 배우자와 부모, 자녀의 승낙을 얻으면 된다.

존엄사법으로 웰다잉의 기초가 마련됐지만 호스피스 병동 확충 및 지원, 연명 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병원 윤리위원회 설치, 관련 전문인력 확충 등 개선할 부문도 적지않다. ‘죽음’이란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던 우리 사회가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품격있는 삶의 마무리를 터놓고 얘기하게 된 것은 긍정적이다. 누구나 죽고, 죽는 것 또한 삶의 일부니까.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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