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일제에 항거한 한의사들

3ㆍ1혁명 100주년이다. 1919년 3ㆍ1혁명은 남녀ㆍ빈부ㆍ종교ㆍ지역ㆍ신분에 상관없이 전 국민의 10분의 1을 넘는 2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걸고 참여해 대한민국을 태동시켰다. 3ㆍ1혁명의 경험과 정신은 일제강점기 내내 치열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됐다.

당시 여건에서 3ㆍ1만세운동 자체도 대단했지만, 3ㆍ1혁명을 기점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민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일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한 결정적 계기였던 것이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큰 피해를 당하였던 한의계 역시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1919년 사이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고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최초로 감행한 강우규 독립의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지금 서울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데, 강우규 의사가 바로 일제의 식민 정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투쟁한 한의사 중 한 분이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의사가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직전 남긴 마지막 한시에는 66세의 노구로 청년들조차 엄두를 내기 어려운 폭탄 투척을 감행한 선생의 독립을 향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강우규 선생은 전쟁기념관에서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한의사 중에는 일제 식민정책에 온몸으로 항거한 독립투사가 여러 명 나왔다. 한의사 강우규를 비롯하여 노병희, 조종대, 심병조, 방주혁, 박성수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죽음을 당했는데, 이들 중 3ㆍ1혁명으로 투옥된 박성수는 솔표 우황청심원을 개발, 조선무약을 창립하여 일반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또한 초대 대한한의사협회장을 역임한 이우룡 회장과 그의 부친 이원발 의사는 대를 이어 독립운동하며, 애국지사 김덕기, 이동녕, 이화영, 안창호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일제는 민족자본 탄압 책으로 조선 효종 때 왕립 한약재시장으로 개설돼 200년 역사를 이어온 ‘대구 약령시’를 독립운동자금과 연락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지목하여 끝내 폐지하고 말았다. 아마 광복이 10년만 더 늦었더라도 이 땅에서는 친일세력들과 일제의 농간으로 한의사와 한의약이 제도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한의사와 한의약은 일제의 말살정책 탓에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아직도 법적 제도적으로 차별을 받는 대표적 분야이다. 보건의료제도에서의 친일잔재 및 적폐를 청산하고, 공정한 의료제도가 회복되어 국민건강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3ㆍ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며 더욱 간절히 소망해 본다.

윤성찬 경기도한의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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