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견기업 사주 A씨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제대로 상속할 경우 수백억원에 달하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다. A씨는 손자 명의로 작은 적자 기업을 사들였다. 이어 자신의 회사 땅을 헐값에 손자 기업에 넘겼다. 자신이 소유한 다른 기업을 동원해 역시 부동산을 헐값으로 손자 기업에 양도하도록 했다. 결손기업이던 손자의 회사는 잇따른 증여로 주식 가치가 급등했고, 손자는 할아버지의 회사 경영권 승계 자금을 확보하게 됐다. A씨의 증여세 탈루는 수백억원대 무상증여를 수상히 여긴 국세청 감시망에 포착됐다.
국세청이 중견기업 사주 일가, 부동산 재벌 등 고소득 대재산가 95명에 대해 전국 동시 세무조사에 나섰다. 이들이 보유한 재산은 총 12조6천억원, 한 사람당 평균 1천330억원이다. 3천억원이 넘는 부자도 15명이나 된다. 하지만 대기업도, 상장법인도 아니어서 재산은 재벌급인데 감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중견기업 사주들의 탈세 수법은 갈수록 진화하는 모습이다. 한 법인의 사주는 쓰지 않은 판매·관리비를 법인 비용으로 처리하는 수법으로 자금을 빼내 자녀 유학비 등에 썼다가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매출거래 과정에 유령 법인을 끼워 넣고 통행세를 받거나 위장 계열사와 거래하며 과다한 비용을 주는 등 일부 대기업의 수법을 그대로 모방한 사례도 있다.
국세청이 100여명에 달하는 부유층에 대해 한꺼번에 세무조사를 단행한 것은 처음이다. 대기업이나 상장회사 등은 국세청의 정기적인 세무조사를 받는다. 그러나 매출액 1천억원 미만의 중견기업들은 지역 세무서 조사에 그치는 등 세무조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국세청이 이번에 대기업과 총수 일가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세당국의 검증 기회가 적었던 ‘숨은 대재산가’들의 세무조사를 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탈세는 중대한 범죄다. 팍팍한 살림에 성실히 세금을 내는 국민들에게 심한 상실감을 준다. 수백원, 수천억 자산가들의 탈세를 절대 용납해선 안된다. 국세청은 조사 역량을 집중해 샅샅이 뒤져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적폐 청산이며 조세정의 실현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대기업·대재산가, 고소득사업자, 역외탈세, 민생침해 탈세 사범 등으로부터 추징한 탈루 세금이 10조7천억원에 달한다. 비양심적인 부자들의 교묘하고 은밀한 탈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탈세하면 패가망신(敗家亡身) 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불법행위를 근절 시킬 수 있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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