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1919년 3월 1일 이 땅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일제의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많은 백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했다. 이 의로운 항거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모태가 됐다. 3ㆍ1운동에서 흘린 선열들의 숭고한 피가 그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된 것이다.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자주독립과 새로운 나라를 향한 열정을 갖고 애국지사들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3ㆍ1독립운동으로 탄생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로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제에 맞서 자주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민족의 긍지와 정신을 잃지않고 조국 독립에 헌신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선열들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는 경기ㆍ인천의 인물들도 대거 참여했다. 경기 광주 출신의 신익희, 파주 출신의 조소앙 선생은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안재홍(평택), 윤기섭(파주), 여운형(양평) 선생도 크게 기여했고, 박시창ㆍ이재현(시흥), 박영준ㆍ박찬익ㆍ안원규(파주), 신숙(가평), 오영선(고양), 이규채(포천) 선생 등도 임정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은 인천과 인연이 깊다. 김구 선생은 밀정으로 들어온 일본군 쓰치다를 처단해 1887년 인천 감리영에 수감됐고, 1914년에는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갇혔다. 이때 청년 김구를 돕고자 인천출신 김주경, 유완무 등과 시민들이 적극 나섰다. 홍진 선생은 서울에 수립된 ‘한성 임시정부’ 탄생에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평생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주로 중국 등 해외에서 활동했지만 경기ㆍ인천 출신 인물들이 곳곳에서 활약했다. 그동안 이들 애국지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활발하지 않았다. 자주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희생을 감내하며 온 힘을 쏟았던 임정 주역들을 재조명하고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의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지자체는 물론 교육계, 시민사회 등에서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되새겨야 한다. 독립운동의 숭고한 가치가 세대를 넘어 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실천하고 계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은 경기ㆍ인천은 물론 대한민국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100년 전 지역과 세대, 종교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민주권 실현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을 기억하고, 그 국민통합의 정신으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해야 한다. 갈등과 이기, 불평등을 극복하고 국민이 주인이 돼 모두 함께 잘사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