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 학교 유적지를 찾아서] 6. 안성초등학교

생선장수도 학생도… 안성 밝힌 ‘독립의 횃불’

지난 4월2일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안성 3•1운동 기념관에서 ‘4•1 만세항쟁, 2일간의 해방’ 기념식에서 안성시민과 학생들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안성시 제공
지난 4월2일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안성 3•1운동 기념관에서 ‘4•1 만세항쟁, 2일간의 해방’ 기념식에서 안성시민과 학생들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안성시 제공

서울에서 일어난 3ㆍ1운동의 기세는 급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안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성 읍내 주민들의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안성군청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당시 안성군청은 바로 현재의 안성초등학교 바로 인근이다. 안성 읍내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업과 연령은 매우 다양했는데 이는 3ㆍ1운동에 참여했던 계층이 그만큼 다양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직업으로 생선장수, 음식점, 망건상, 구두상, 미곡상 등 상업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안성 읍내 지역의 지역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안성은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유래할 정도로 유기가 유명했으며, 안성시장의 경우 조선후기 3대 시장이기도 했다.

안성 읍내에서는 3월 11일 오후 8시경 장터의 상인들을 비롯한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에 일제는 경찰을 출동시켜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주도한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성공립보통학교(현 안성초등학교)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들이 18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고 경찰서에 구금하면서 일찍 진압되고 말았다.

잠시 소강기를 거치고 만세시위는 이후 계속돼 3월 28일과 29일에는 수십 명이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이어서 3월 30일 읍내에서의 만세시위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오후 7시경 군중 약 1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시작했고 주변 마을에서 다수의 군중이 모여 일시에 1천여 명이 무리를 지어 안성경찰서와 안성군청,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면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고, 안성군청 앞에서는 군수에게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3월 31일에도 마을 단위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오후 4시에는 안성조합기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주변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1천여 명의 군중들이 안성군청과 안성경찰서,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부르고, 읍내 일대를 행진하다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오후 7시 30분경 다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등에 불을 켜고 만세를 불렀으며 면장이 안성공립보통학교로 군중들을 집합하도록 해 간곡히 설득하자 군중들은 해산했다. 특히, 3월 30일과 31일의 안성읍내에서 전개된 시위의 양상은 대규모의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시위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 경험의 주체는 특정한 지역적 맥락 속에 위치한 보통의 사람들이며, 이 보통 사람들이 누적시켜온 기억은 과거를 온전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학계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이에 지역에서 일어난 3ㆍ1운동에 대해 망각돼 있는 기억을 추출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는 흔적(장소)이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옛 안성군청 터의 비석은 우두커니 서 있지만, 독립만세운동의 주체였던 수많은 안성 읍내 주민들이 목소리는 담겨져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억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이뤄지는 기념과 기억의 소환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며 오히려 과거와 현재의 지역민들을 다시금 소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기념의 방향 또한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지역민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착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허영훈 안성 광덕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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