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선생은 2종 교사… 교원자격 없다” 격분… 어린 학생들 민족차별 조장하는 日 교사에 집단 항거
2019년은 31 운동이 일어 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1919년 3월 1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유관순 열사,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의 함성과 태극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총과 칼을 든 일본 경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교과서에서 또는 TV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을 것이고, 또는 박물관 역사책을 통해 31운동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 모두의 이야기이며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대한 독립 만세”가 전국으로 울려 퍼지기까지 이야기 중에 학생과 학교의 이야기를 돌아보고자 한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되어도 33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은 거사가 무산될까 걱정하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때 황해도 해주의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이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던지며 환호했다. 그렇게 학생 주도의 3·1운동은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경우 유혈 사태를 우려하해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진행하고 담담히 일본경찰에게 자수하고 연행됐다. 3·1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이 되었으며 지위, 연령, 성별을 구별하지 않는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2018년 말 국가보훈처는 항일학생운동 참여 학교 학적부를 전수 조사한다고 밝혔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이 새로운 독립 유공자 포상 기준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독립운동 관련 학생 처벌자가 4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국의 모든 학교를 조사해 보면 그 수는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교과서를 비롯한 수많은 책과 영화들에서 1919년의 청소년은 만세 운동에 등장하는 주변인 또는 보호받아야 하는 역할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학생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거리로 나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경기도에서도 학생 중심의 독립운동이 동맹휴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장현공립보통학교는 1926년 5월 6학년생 전원이 민족차별과 열등감을 조장하는 일본인 교사에 대한 집단항거에서 비롯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6학년 담임교사 우에무라가 자신은 자격이 있는 1종 교사이나, 조선인 선생은 2종 교사이므로 교원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한국민족의 감정을 상하게 한 점과, 이에 비해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이 교사에 대한 자질문제로 인해 발생되었다.
마침내 1926년 5월 6학년생 전원은 평소 민족차별적인 우에무라의 언동에 반발해 동맹휴학을 벌이게 되었다. 동맹휴업의 결과는 사후보도가 없어 알 수 없으나, 학생들의 항일민족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현재 장현초등학교가 자리잡은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379은 장현공립보통학교가 있던 곳이다. 100년 전, 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에 대항하며 교문을 나설 수 있었으며 일본의 총 칼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고난의 시기에도 새로운 꿈을 꾸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를 지키고 독립을 이뤄내겠다는 수많은 학생들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규 수원 신풍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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