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미군의 첫 오산 전투

1950년 7월5일 미 제24보병사단 21연대 제1대대의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스미스부대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하며 오산 죽미령 고개에 진지를 구축했다. 병력도 겨우 406명. 이들이 그렇게 북한군을 무시했던 것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독일군을 무찌른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예기치 않게 전개됐다. 7월5일 오전 7시 북한군 제4사단 제107기갑연대가 탱크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했는데 비가 내려 미군 측 비행기가 뜰 수 없었고 105㎜ 곡사포와 75㎜ 무반동총으로는 적의 탱크를 막아 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겨우 탱크 2대를 격파한 미군은 오전 10시 오산으로 후퇴했으며 오후 2시에는 북한군 4사단의 주력부대가 물밀듯 공격해 오자 오산도 포기하고 천안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60명이 전사했고 8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북한군도 120명이 죽었다.

이것이 1950년 6ㆍ25 전쟁에 미군이 이 땅에서 북한군과 벌인 첫 전투였으며 이를 ‘오산 전투’ 또는 ‘죽미령 전투’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첫 전투로서는 너무 큰 손실이었다.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오산-안성에서 적을 격퇴하겠다는 계획이 실패하자 산하 34연대를 천안에 급파하여 또다시 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막지 못하고 연대장 마아틴 대령이 전사하는 불운마저 겪게 된다. 연대장의 전사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딘 소장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대전차포의 긴급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지금 세종시 전동면에 있는 개미고개에 진지를 구축했다.

개미고개는 차령산맥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자 경부선 철도와 국도 1호선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 개미고개 능선에 배치된 미군은 667명이었으며 계곡은 안개가 자욱하여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악조건 속에 적은 포위망을 압축해 왔고 미군은 7월6일부터 7월11일까지 5일간을 버티며 용감하게 싸웠으나 너무나 희생이 커지자 이곳도 포기하고 조치원으로의 후퇴를 단행한다.

이 개미고개 전투에서 미군 667명 중 517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의 90%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은 것인데 한국전에서 한 전투를 통해 이렇게 인명 손실을 입은 것은 ‘개미고개 전투’가 유일하다. 그러니까 오산 죽미령에서 60명을 포함 불과 1주일 사이에 미군 577명이 희생됨으로써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렇게 큰 희생이 있어 미군은 다시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금강 방어선도 얼마 안 가 무너졌지만 여기서 또 시간을 벌어 6ㆍ25 최후의 전선, 낙동강 방어선이 견고하게 구축될 수 있었다.

그렇게 죽미령 오산 전투-천안 전투-개미고개 전투를 거치면서 견고한 낙동강 방어선이 완성됐고 지원군의 도착, 대전차포를 비롯 강력한 무기의 배치, 공군의 제공권 장악 등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군은 계획대로 부산, 제주도까지 손에 넣고 이 나라는 공산치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죽미령과 개미고개에는 고귀한 희생을 치른 미군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그 전투가 있었던 날에는 조촐한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진혼곡나팔이 울려 퍼지면 머리 숙여 눈을 감는다. 그런데 올해는 6ㆍ25 69주년을 보내는 마음이 무겁기만 한 것은 왜 그럴까?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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