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판문점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내가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가 세숫대야에 물 받아서 발 씻으라고 내놔요.”, “여보, 재떨이 가져와! 그러면 마누라가 내 앞에 재떨이를 대령하지요.”(북한 노동신문 기자)

“아이고, 부럽습니다. 저는 집에 애가 있어서 담배는 집 밖에 나가서 피우지요. 집안에서 담배 피우면 집사람한테 혼나요.”(나)

“사내대장부가 마누라한테 쥐여사는군. 남조선 남자들 문제가 많군.”(노동신문 기자)

우린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이런저런 신변잡담을 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질 시간을 맞이하곤 했다.

내가 서울 외신기자 시절이었던 1990년대 초반 무렵, 남북군사정전위원회가 판문점에서 열리는 날에는 아침 일찍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에서 유엔군사령부 소속의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한다. 버스 안에서 유엔군사령부의 공보관이 ‘판문점 안에 들어가서 군사분계선 남쪽에서는 우리 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분계선 북쪽으로 넘어갔다가 납치되면 우리는 힘을 못 쓴다. 알아서 판단하시기를 바란다.’ 등의 겁박성(?) 주의사항을 취재기자들에게 하달한다.

유엔사 공보관의 이런 공갈에 지레 겁먹고 주눅이 들 기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사정전위 회담이 시작되면 우르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 땅으로의 단체월북을 감행하곤 했다. 그 당시의 살벌했던 남북 간의 긴장 대치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북한 기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 북한지역 나무 그늘에서 신변 잡담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즐겼다. 그래서 나에게 판문점 취재 가는 날은 북한 땅으로 소풍 가는 날이기도 했다. 정적만 감돌고 새들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땅이 바로 그 당시의 판문점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 당시 북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사귀면서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실로 컸다. 북한은 유교적 생활 방식을 기반으로 하는 ‘유교적 사회주의’가 북한 통치시스템의 근간인 듯했다. 서구식 공산주의와는 다르게 예전의 우리 부모님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온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앞으로 남북 간의 민족통합과 통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접목 요소이기도 했다.

며칠 전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았다. 나는 그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며 지난 시절 내가 처음으로 판문점 북측 지역을 넘어갔을 때를 회상하면서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 땅을 직접 밟아보고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북한에 대한 접근 방식에 다소의 생각 변화가 오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百聞不如一見(백문불여일견)’

장준영 前 경기신용보증재단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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