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판결의 신뢰, 그리고 판결문의 사족

‘관행이다’•‘명복을 빈다’…
판결•결정문에 쓸 법어인가
괜한 사족, 판결 공격의 빌미

J판사의 영장 기각률 60%. 나머지 판사들의 기각률 5%. 1990년대 수원지법 얘기다. 영장전담판사 제도가 없었다. 당직 판사가 영장을 심사했다. J판사의 기각률이 유독 튀었다. 기자 여럿이 말했다. “판사에 따라 들쭉날쭉한 건 문제다.” 꼬투리를 잡겠다고들 덤볐다. 그의 ‘기각 사유’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어떤 기삿거리도 찾지 못했다. 빌미를 주지 않는 기각사유였다.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 없음’.

그로부터 십수 년 지난 2009년. 그가 내부망에 글을 올린다. 대법관 거취에 대한 견해다. 당시 파문이 컸다. 그 글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시위의 형태가 현행법에 저촉된 바가 있다면 그에 따라 결론을 내면 그만입니다. 판사의 입장에서는 진보세력이 보수정권에 대항하여 시위를 했건, 보수세력이 진보정권에 대항하여 시위를 했건 그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J판사다웠다. 영장 60%를 기각해버리던 그 다웠다.

돌아보면 판사들이 대개 그랬다. 판결문은 철저히 법어(法語)로 썼다.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만 봤다. ‘증거 있으니 유죄’라고 썼고, ‘증거 없으니 무죄’라고 썼다. 영장 심사도 그랬다.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만 설명했다. 있으면 구속하라 썼고, 없으면 풀어주라 썼다. 오로지 핵심만 논하는 판사들의 언어였다. 초년 법조 기자 땐 그걸 “성의없다”고 여겼다. 출입 경험이 늘면서 달리 보였다. “판결문의 힘은 단조로움에 있다.”

그랬던 판사들의 법어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런저런 사족(蛇足)이 늘어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환경부 체크리스트-사건이 그랬다. 판사가 김은경 전 장관 영장을 기각했다. 기각 사유로 600자를 적었다. 그 속에 여러 표현이 등장한다. ‘최순실 일파 국정농단’이라 썼다. 별개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적 표현이다.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도 했다. 기각 논리의 출발을 법외(法外)에서 찾고 있다. ‘위법성 인식이 다소 희박해 보인다’고도 했다. 범의(犯意)를 주관적으로 계량화해 낸 표현이다.

‘세월호 특조위 방해’ 판결 때도 그랬다. 서두에 이런 설명이 등장했다. ‘재판부로서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종료하게 된 것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판결이 아니었다면 따뜻한 말이다. 안쓰러움을 전한 말이다. 하지만, 판결을 선고하는 자리다. 조윤선에 유죄를, 안종범에 무죄를 정하는 판결이다. 여기서 명복을 비는 수사(修辭)가 필요했을까.

짐작되는 바가 없진 않다. 1990년대와 환경이 다르다. 판사의 모든 것이 파헤쳐 진다. 판결문도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어떤 기업인에 대한 영장이 기각됐다. 기각한 판사의 모든 게 폭로됐다. 그 기업인에 대해 부분 무죄가 선고됐다. 판결문이 음절까지 분석됐다. 30년 근무 한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말한다. “요즘 판결문 쓰기 참 무섭습니다.” 이래서 길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위기가 사족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답이 없다. 60자 기각사유와 600자 기각사유. 어느 쪽에 옳고 그름이 있나? 없다. 사족 없는 판결문과 사족 있는 판결문. 어느 쪽에 옳고 그름이 있나? 없다. 다 같은 기각 사유고 판결문이다. 그럼에도, 이 논제를 끄집어 내 보는 이유는 있다. 판결문은 여전히 정의를 가려내는 보루다. 기각과 무죄가 공격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각 사유와 판결문구가 트집 잡혀선 안 된다. 괜히 단 사족으로 빌미를 주는건 불행이다.

1990 몇 년 수원지방법원. 영장 기각률 60%와 5%. 엄연한 불균형이었다. 그래도 J판사는 굽히지 않았다. 언론에 책잡히지도 않았다. 그 힘이 법어였다. 정제되고 절제된 법어-‘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 없음’-를 꽉 붙들고 벗어나지 않았다. ‘관행이 있었다’ ‘명복을 빈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꼭 필요한 법어였을까. 2019년을 사는 판사들이면 한 번쯤 토론해봐야 한다. 답은 없겠지만, 판사실 문 걸어 잠그고 얘기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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