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 고미숙 작가에게 듣는 ‘열하일기’] “교감하되 집착하지 않는 삶… ‘노마드’가 돼라”

주류에서 벗어나 자유로움 추구한 박지원
어디서나 집 짓는 유목적 삶 담긴 ‘열하일기’
각자의 시공간서 생성되는 새로운 사유들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 글로 남겨야

과천교육도서관에서 9월17일 열린 작가 초청 강연회에서 고미숙 작가와 독서동아리 ‘봄날의 곰’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과천교육도서관에서 9월17일 열린 작가 초청 강연회에서 고미숙 작가와 독서동아리 ‘봄날의 곰’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얼마 전 가을장마와 태풍이 훑고 지나간 자리로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 아직 피해 복구 지원이 계속되고 있는 곳도 적지 않지만, 자연의 위력 앞에 고개 숙였던 눈을 들어 유난히 새파란 가을 하늘을 쳐다본다. 가을이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특히 9월은 ‘독서의 달’이라 부르며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들을 기획해 독서 축제를 벌인다. 과천교육도서관에서도 독서의 달 행사로 다양한 강연과 체험프로그램들을 많이 마련해 놓았다. 9월 17일 오전 내가 속한 독서동아리에서 주관한 고미숙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연암 박지원은 양반 신분임에도 ‘입신양명’이라는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던 자유로웠던 인물이다. 그의 ‘탈주’는 새로운 연대로 향하는데,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 당대 지식인들과의 소통 네트워크인 ‘백탑청연’이 그것이다. 작가는 책에서 ‘중세 지성사의 빛나는 별자리’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우정과 연대를 소개하고 있다.

이같이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과의 접속을 위해 지배적인 담론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연암은 마침내 국경을 넘어 열하로 향하게 된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2천여 리, 연경에서 다시 열하까지 700여 리를 가는 동안 일상과는 구별되는 삶의 새로운 경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 반가운 접속의 장에서 침묵하고 있던 언어와 사물들을 발굴하고, 예기치 않은 담론들을 특유의 사유로 풀어낸 것이 바로 <열하일기>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연암의 ‘낯설고 새로운 여행기’는 그렇게 탄생됐다.

작가는 <열하일기>의 미학적인 특징으로 웃음과 역설을 이야기한다. 연암이 지닌 유연한 사고와 유머는 기존의 사유를 뒤흔드는 전복적 상상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작가 또한 강연 중간 중간 ‘연암식’ 유머를 구사하곤 했다. “꽃길만 걸으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말을 진짜 싫어한다는 작가는 “꽃길 걷다가 알레르기로 고생한다”, “나는 사랑을 하는 존재인데 왜 자꾸 사랑을 받으라는지 모르겠다” 이런 전복적인 말들로 사람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끌어냈다.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특히 “낮에 가족들과 있는 거 아니다”라는 말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20세기 자본의 통치 전략인 핵가족화는 많은 사람들을 노동과 가족에 매몰시켰으며, 사회적 네트워크를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우정’이라는 윤리를 회복하고 사람과 사람의 연결, 가족 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해 떠 있을 때는 가족과 만나지 말자”라는 한마디 유머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강연회에 모인 80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시공간에 모여 강연을 들으면서도 각기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동일한 곳에 있어도 동일한 것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시공간을 경험한다. 연암이 열하까지의 여정을 통해 <열하일기>라는 담론을 생성했다면 우리는 그와는 또 다른 의미를 변주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강조한 마지막 말은 ‘자신의 언어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집을 벗어난 각자의 시공간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사유들을 글로 남기라는 것이다. 작가는 말할 수 없이 허무한 인간의 유한성은 책에 담긴 지혜를 통해 무한하게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만드는 건 문장이며, 그렇기에 오늘을 담은 일상의 글쓰기가 곧 역사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모여 일생이 펼쳐지고 역사가 된다면,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작가는 “내 삶에서 원하는 것을 당장하라”고 주문한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되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한다. 어디서든 집을 짓고 어디서든 집을 떠나는 삶, 그런 유목적 텍스트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작가 또한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노마드’를 권한다. 친숙함과 낯섬의 경계, 삶과 지식의 경계, 삶과 글의 경계에 서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는 삶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멋지다. 18세기 연암이 가졌던 명랑한 생명력이 21세기의 청명한 어느 가을 날 하루를 생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작가의 유쾌한 지혜 나눔에 감사를 전한다.

경기과천교육도서관 독서동아리 ‘봄날의 곰’ 회원 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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