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길, 그린랜드 상공에서 조병화(1921~2003) 시인은 ‘천적’이란 짧은 시를 쓴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딱 한 줄, 12글자다. 짧지만 울림이 크다. 조국 사퇴 전후 문 대통령의 행보와 발언이 어찌 이 짧은 시와 일치하는지 공교롭다. 조국 사태의 최대 패배자는 조국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다. 상식과 양심의 문제를 진영과 검찰개혁의 싸움으로 몰아간 문 대통령의 오판이었다. 대통령은 지지층의 충성심을 믿었으나 절대다수 국민의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중도층 이탈에 따른 지지율의 최저치 경신이 결정타였다. 역설적으로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 위기를 느끼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 사람임을 증명했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소득 주도 성장’과 ‘탈원전’ 등 핵심 정책의 오류를 인정하거나 철회한 적이 없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조국 사퇴로 한발 물러났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고 이제야 판단한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조씨 사퇴 직후 “국민 사이에 많은 갈등을 야기한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사과는 했지만 발언 대부분 검찰 개혁과 언론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검찰 개혁의 핵심은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조정이 아니라 대통령이 검찰 인사권을 내려놓으면 된다. 문 대통령은 이 점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언론의 ‘성찰’을 얘기한 대목에선 더 기가 막힌다. 사실 이 정권에 우호적인 언론을 대표적으로 들면 KBS와 한겨레신문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조국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기자들이 반발하지 않았던가? 성찰은 지금의 사태를 만든 문 대통령이 해야 한다. 대통령은 아직도 국민의 분노를 임시변통으로 넘어가려는 것 같다. 대통령은 이번 민심에서 드러난 것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조국 일가에 대해서는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국정 전반에 대한 방향전환과 함께 쇄신안을 마련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게 먼저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게 나라냐”는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다고 외쳤다. 이제 그 질문은 바깥으로 던지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조국 사퇴에도 불구하고 공수처 설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한 무리수를 계속 두게 되면 나라 꼴은 말이 아니게 된다. 공수처를 통한 검찰 장악으로 퇴임 후 안전판을 마련하려는 순간 파국이다. 끝없는 오기와 아집으로 국론분열과 깊은 대립의 골을 만든 문 대통령의 과오는 치명적이다. ‘조국 사퇴’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국민만 바라보는 검찰수사, 국민만 생각하는 검찰개혁, 진정한 대통령의 반성과 사과만이 해법이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가장 큰 적(敵)은 나만을 고집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라고 자문했다. 문 대통령의 천적(天敵)은 나만 옳다는 독선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진보 진영과 핵심 지지층 감싸기에서 벗어나 국민 대다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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