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언어의 저급성

쌤통이라는 말은 남이 낭패 본 것을 고소해하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여러 어원설이 있으나 시샘하는 심통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상대에게 전달되는 이 표현은 ‘피그말리온’(긍정 효과)과 ‘스티그마(Stigma)’(낙인 효과)를 가져오며 반응 또한 크게 다르다. 극단의 언어는 사회 갈등을 확장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개인에 대해서는 쌤통의 언어를, 정국에 대해서는 비어로 덧칠하는 지식인이 많아졌다. 안타깝다. 지식인의 본령은 비방보다 비판, 비판보다 걱정, 걱정보다 대안, 대안보다 선행에 있을 때 참지식인이다.

당사자에게는 불행이랄 수 있는 사건마저 저급한 댓글을 달거나, 남의 불행에 욕이 동반된 혐오적 언사로 반응하는 것은 저급한 사람의 짓이다. 리처드 H. 스미스는 <쌤통의 심리학>에서 남의 고통을 즐기는 심리를 살핀 바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 성정은 쌤통보다 ‘쯧쯧’하고 동정하는 심리다. 고통의 즐김이 지나치면 쌤통이 아니라 잔인성이 된다. 로티(R. Rorty)는 자유주의자의 근본은 “잔인함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했다. 곧 잔인성은 자유주의와 배치되는 또 하나의 파시즘이다. 공자는 서(恕)를 인의 출발이라 했다. 측은지심의 반대편은 잔인함이다. 죄를 봐주자는 것, 묵과하는 것이 용서의 본연은 아니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처분은 당연지사다. 잘못이 있다면 문책을 하고 과오를 묻되 측은히 여기는 마음만은 인간 본성으로 유지하여 심성이 잔인성의 극단에 있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한일 관계와 진영 갈등도 그렇다. 갑론을박이야 민주 사회에 의사 표현의 자유라 하겠지만 ‘친일, 토착왜구’ 등과 비어를 동반한 극단의 용어들로 이전투구하는 모습은 결과 바람직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어떤 이는 친일이라는 낱말이 현대 지구촌 시대에 부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국제 관계로 보면 부정 어의로만 볼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이 용어 사용의 합당함은 아직 이르다. 언어는 사회성을 내포한다. 친일이 부왜의 뜻과는 다르나 우리 역사가 이를 의미하는 뜻을 지니게 했고(가령 친일파) 대체로 언어적 사회성으로 고착되었다. 친미, 친중 등의 의미와 다른 점은 일본과의 특별한 역사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측면의 친일이라는 말은 반감이 있을 수 있다. ‘친일, 반일’용어보다 ‘지일, 극일’의 용어가 좀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미래 지향적인 친일(지일)에도 토착왜구라 비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왜(왜구에 붙어 반역하는 무리)는 비판받아 마땅하고 이 땅에 더는 용납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냉정한 시각으로 국수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건강한 지성이다. ‘토착왜구’ 남발은 서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다. 이야말로 일본이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자신이 부왜하지 않음을 은근 드러내기 위한 모순된 심리일 수도 있다. 걸핏하면 ‘좌빨’이라 몰아 부치는 심리도 이와 진배없다. 견해가 다르다 하더라도 의견을 존중하고 전향적인 태도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혐오적 언사는 극단으로까지 몰아붙이는 인격의 저급함에서 온다. 언어란 언중의 상태를 반영하며 민족성을 형성한다. 아주 단편적인 말이라도 몰인간적인 의사 표현은 잔인성의 숙주가 된다. 우리 모두는 저급하고 부정적 시대를 형성한 언중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만식 경동대 온사람교양교육대학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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