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82년생 김지영’과 ‘워라밸’

‘82년생 김지영’은 그 시절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곧 우리의 딸들이 맞닥뜨릴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숨 가쁘게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느리게 변하는 세상은 여성들의 삶인 듯하다. 특히 직업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 기혼여성에게는 더 엄혹하다. 한국사회처럼 모성이 신성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직업이 있는 기혼여성은 슈퍼우먼 신드롬을 숙명처럼 안고 산다. 남성들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성장주도적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아이 커가는 즐거움은 뒤로 한 채 부양의 책임을 온전히 짊어졌다. 김지영의 남편 ‘대현’ 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은 개인차원을 넘어서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우리가 인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6년 OECD 주요국의 연간 노동시간을 살펴보면 독일의 연간 노동시간은 1천363시간으로 회원국 중 가장 적고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프랑스 순이다. 39개국 기준으로 중위권인 미국이 평균 1천763시간에 근접한 1천783시간이다. 한국은 2천69시간으로 멕시코, 코스타리카와 함께 하위 3개국에 속한다. 빛나는 경제성장으로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경제의 신화는 국민의 땀과 시간을 먹고 자란 것임은 보여준다. 이제야 주당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상황에도 갑론을박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제도적 정착이 이루어진다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한편,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도 여성의 노동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노동현장에서 유리천장과 유리벽의 성차는 여전히 공고해 여성은 남성보다 34%의 임금차별을 겪는다. 맞벌이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의 5배에 육박하고 경력단절 여성의 90%는 출산과 육아, 가사를 이유로 들고 있다. 한번 경력단절이 되어 인적자본가치가 하락하면 그 이전의 커리어 트랙(career track)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저임금 군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처럼 ‘가사노동의 여성화’는 사회노동에서 여성을 주변화하는 기제로 작동해 ‘빈곤의 여성화’로 이어지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된다면 영화 속 ‘지영’과 ‘대현’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겠다. 제시간에 퇴근해 한 사람은 아이를 픽업하고 한 사람은 저녁준비를 하고 함께 아이를 돌보고 가사일을 나누어 하는 일상을 그려본다. 우리의 딸과 아들은 영화 속 이야기보다는 좀 더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면서.

조양민 행동하는 여성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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