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인천] 차라리

얼마 전 한 종교신문에서 여러 박사학위를 취득한 어느 종교인이 쓴 칼럼을 읽게 됐다. 원래의 취지와 달리 비판과 분석을 멀리하는 작금의 종교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으로서, 그 종교의 구성원들을 비판하는 대신 1천300여 년 전의 선배인 원효대사와 그 사상을 폄훼하는 글이었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상식과는 크게 다른 내용이어서 관련 논문을 찾아봤더니, 그 저자의 논지는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판단됐다. 며칠 뒤 한 일간지에도 그 저자의 칼럼이 게재됐는데, 그 역시 근거가 부족한 주장들이었다.

고심 끝에 그 종교신문에 실린 그 저자의 논지에 대한 나의 ‘다른 의견’을 투고하게 됐다. 나의 글이 ‘특별기고’란에 ‘반론’으로 실리고 나니 몇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중 하나로 “저런 글을 이렇게 친절하게 반박할 가치도 없어요. 묵빈대처(默賓對處)가 딱 어울립니다”라고 했다. 평소에 ‘묵언’이라고는 들어보았는데 ‘묵빈대처’라는 용어가 생소하기에 찾아봤다.

석가의 임종이라는 극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간명하게 설명한 유교경(遺敎經, 佛入涅槃略說敎誡經)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自燈明 法燈明), 경전의 첫머리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해 유명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다.

싯다르타 태자의 마부였다가 나중에 출가해 제자가 된 ‘찬타카(車匿)’는 붓다가 출타하시어 계시지 않을 때만 제자들에게 “내가 새벽에 싯다르타 태자를 말에 태워 성을 넘지 않았다면 그 분은 출가를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 덕분에 부처가 되신 거야”라고 공치사하며 다른 제자들을 업신여겼다.

아난다는 붓다가 입적하기 직전에 이 문제에 대해 물었다.

붓다는, 위세를 부리는 ‘나쁜 승려(惡性比丘)’에게는 묵빈대처(默賓對處)하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마부처럼 교활하며 앞뒤가 다른 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사람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 ‘왕따’를 시키는 사례가 많다. 지속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경우 일체 대응하지 않고 외면하고 침묵으로 대처하면 스스로 깨달아 고치게 되리라는 기대의 교육방법이리라.

그 댓글을 다시 보고 나니, 나도 효과 없는 글을 쓰느라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넌지시 들었다.

바로 그때 만해 한용운의 시 <차라리>가 떠올랐다.

“님이여 나를 책망하랴거든 차라리 큰 소리로 말씀하야 주서요. 침묵으로 책망하지 말고.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 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이번 논쟁이 그 박사님으로 하여금 근거에 바탕을 둔(Evidence based) 글을 쓰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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