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임자, 나를 좀 도와주시게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하여 드리고자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대로 일합을 겨룬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권토중래를 꿈꾸면서 대권을 잡기 위한 거점조직인 아태평화재단을 꾸릴 때인 1990년대 중반 무렵의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어느 날 불쑥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에 보수 야당 세력이었던 국민당 원내총무 출신인 이동진 전 국회의원(과천 의왕)을 찾아와서 자신의 향후 구상을 밝히며 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한다. 성격이 깔끔하고 담백한 이 전 의원은 그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요청을 흔쾌히 승낙한다. 원래 후원회장이란 돈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는 자리인데 그는 돈 만드는 데는 재주가 없는 분이었다. 이 전 의원은 ‘하필 왜 이런 나에게 후원회장 자리를 맡기는가?’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동진 전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주역 가운데 한 명인데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으로 고향 영동에서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했다가 유신 때 지역구를 박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오빠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는 와중에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보수 야당 국민당 소속으로 경기도 과천·의왕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원내총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이분은 나에게는 외삼촌뻘에 해당하는 인척이다. 그래서 나의 과거 기자 시절부터 줄곧 나에게 미주알고주알 이런저런 생생한 경험담과 지혜의 말씀을 해주시곤 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두 분의 관계는 박정희 정권 시절, 여당 공화당 소속의 이동진과 야당 신민당의 김대중은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만나 교유를 맺고 우정을 나누어 왔다. 아태평화재단 후원회장 이동진 전 의원은 먼저 5.16 혁명동지이자 친구이자 당시 김영삼 정권에 밉보인 박태준 최고위원을 김대중 쪽으로 끌어당기는 데 성공한다. 그다음 단계로 충청권의 맹주 김종필 씨를 박태준 씨와 함께 설득하여서 김대중-김종필 연합인 ‘DJP 연합’을 성사시킨다. ‘신의 한 수’였다.

이로써 우리 국민은 사상 최초로 민주진보진영의 정권을 맞이하게 된다. 이동진 전 의원의 막후 역할은 이처럼 결정적이었다. 아쉽게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며칠 앞두고 이 전 의원은 지병으로 별세했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지 않았더라면 노무현 정권도 없었을 터이고, 지금의 문재인 정권의 탄생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비록 상대 진영에 있을지라도 좋은 인재를 등용하며 내 사람으로 만드는 김대중이란 정치 거인의 포용력과 대범함을 요즘의 민주진보진영 사람들은 깊이 새겨야 할 때이다.

장준영 前 경기신용보증재단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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