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유배를 떠나거든…

몇 해 전 시간을 내어 경상남도 남해에 있는 노도(櫓島)를 다녀왔었다. 눈부시게 파란 바다와 아름드리 동백나무 숲. 참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섬에 조선조에 이르러 ‘구운몽’을 쓴 김만중을 비롯하여 남구만 등 7명이나 되는 문신들이 유배를 살았다는 사실에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애련한 생각이 들었다.

바다와 갈매기를 벗 삼고 동백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세월이 바뀌는 것을 알며 떠나온 부모ㆍ형제, 처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특히 김만중은 이곳에 귀양살이하는 동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받고 글을 쓰다가 눈물이 쏟아져 글을 맺지 못했다 하니 그 마음 짐작이 간다. 그래서 이곳에는 유배 온 선비들이 남긴 글이 많고 남해군에서는 이런 작품을 모아 ‘유배문학관’이라는 특별한 문학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런 유배지에서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그래도 위안을 삼는 글은 어떤 것이었을까?

흔히들 유배 온 선비들은 다음과 같은 글을 벽에 써놓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참을성을 기르고, 할 수 없었던 일도 하게 한다(是故動忍性增益其所不能)’. 그런가하면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며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무려 18년이나 했는데 그의 유배생활 역시 특별했다. 주막집 뒷방에서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았지만, 그 귀양살이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고상한 이름을 붙였고, 거기에 따른 네 가지 수칙을 ‘사의재기’라 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첫째, 생각은 담백하게 할 것. 둘째, 용모는 엄숙하게 할 것. 셋째, 말을 적게 할 것. 넷째, 행동은 무겁게 할 것. 그러면서 마지막 글에 ‘나는 이 날 주역의 건괘를 읽었다’고 했다. 건괘를 읽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그의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뜻한다. 과연 그는 조선의 개혁이라는 큰 뜻을 당장 이루지 못하였지만 ‘목민심서’라는 불후의 명 저서를 남겨 지금까지도 모든 공직자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1836년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올랐으나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자 10년 전의 사건으로 1840년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다. 말하자면 정권이 바뀌자 정치보복을 당한 것이다. 유배기간도 1848년까지 무려 9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만든 작품이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가 아닌가.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세찬 겨울바람이 몰아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참 멋진 글이요 그림으로 당당히 국보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과 글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것을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핵심은 그 황량했던 제주도 유배지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지만, 그 뜻은 굽힘이 없이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견디어냈다는 정신력이다.

이처럼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저술했고 서포 김만중은 ‘구운몽’을 완성하는 등, 그 옛날 우리 선비들이 숱한 유배생활에도 굽힘 없이 자기 세계를 지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요즘 단행된 검찰 고위급 인사에서 정권수사를 지휘했던 간부들의 ‘영전성 좌천’ 발령을 가리켜 조선시대의 사화(士禍) 또는 ‘유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유배’라면 그들에게 선비들이 유배지에서 위안받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고사(古史)를 읽어보길 원한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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