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너 고향이 어디라고 생각해?”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장난스레 질문을 던졌다. ‘고향’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알고 있을까라는 생각과 더불어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더니, “응, 박광수 산부인과?!”라는 아들의 나름 진지한 대답은 둔탁한 무언가가 내 머리를 치는 충격이었다.
유치원을 같이 다니던 절친과 이사하면서 헤어질 때 녀석의 닭똥 같은 눈물이 떠오르고, 몇 번의 이사는 그에게 고향을 생각할 겨를과 이유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수백 년 된 동족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고향은 유일무이한 공간이지만 아들에게 아비의 고향일 뿐이다. 더욱이 어린 그에게 몇 번에 걸친 이사는 공간적인 정주 의식을 느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몇 번 이사하게 된 까닭은 집주인의 부도 때문이었지, 이사를 통한 재산 늘리기와는 관계가 멀었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보다 크고 값비싼 아파트로 이사하며 부를 늘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자본주의적 욕망과 직장을 위한 잦은 이사에서 아이들이 받는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사와 전학으로 받는 정신적 내상은 사춘기의 반항으로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아들딸들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라도 이사 가지 않고 한 곳에서 사는 것이었다. 비록 그 동네가 좋든 싫든 한 곳에 정주하여 살면서 적어도 학창시절의 온전한 시공간은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들딸이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비로소 성안으로 이주하였다. 사람들은 낙후된 성안에 들어와 사는 까닭을 의아해한다.
편리한 아파트와 돈 되는 다세대 주택이 아닌 삶의 공간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고, 더욱이 한옥을 짓고 살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아들딸이 훌륭한 위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아파트를 탈출하라고. 아들딸이 유명한 인물이 되고 나서 그들의 ‘○○아파트 1503호’를 생가라고 방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역사적 장소성은 중요하다. 나혜석 생가터를 문제 삼는 어느 언론사의 몰상식조차 공간적 장소성에 대한 의미 부여를 알기 때문이다.
작지만 누추하지 않은 한옥, 그 장소성의 확보는 값은 올라가지만 끝내 사라질 아파트의 부박함과 바꿀 수 없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누대에 걸쳐 사는 후손들이 기억하는 공간을 소망하는 것이리라.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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