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속 정치 발전에는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 1960년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에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이는 마산상고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3월14일 남원에서 마산으로 갔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었고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사망 후 한 달여가 지났지만 시신은 부패하지 않고 다시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공중으로 발사해야 하는 최루탄을 직격으로 발사,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에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뤄 시위하기 시작했고 이는 4월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로 연결되고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화학과 54학번 김왈영 열사의 사망으로 4ㆍ19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하야와 함께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로부터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전두환 신군부의 폭정 하에 있었고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구속돼 물고문 도중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열사의 사망 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된다. 그리고 대통령 전두환은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대통령 직선제가 골자인 개헌 논의는 88서울올림픽이 지나고 하자며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축소됐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국민의 분노는 더욱 상승하게 되며 6월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 집회를 전국에서 열기로 한다. 그 하루 전날 각 대학교는 캠퍼스에서 사전 집회를 하고 연세대학교도 1천여명이 집회를 진행하며 교문을 나와 거리시위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게 되며 넥타이 부대의 등장과 함께 5공 정부는 6ㆍ29선언과 함께 그 막을 내리게 된다.
해방 후 채 100년도 되지 않는 대한민국 민주 역사 속 두 번의 큰 시민혁명의 중심에는 모두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 학생들이 과거와 같은 물리적 혁명의 주체 혹은 시발점이 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많이 발전했고 정당한 시위나 국민청원 등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들도 항상 사회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정치에 최소한의 관심이 있어야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나라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선배 학생들의 흘린 피로 이뤄낸 민주주의를 이제 우리와 같은 학생들이 항상 깨어 있는 시각으로 민주주의 정치의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할 것이다.
안양외국어고 진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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