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외로운 국회의장

여성들의 미니스커트가 전 세계로 번지던 1972년 1월, 근엄하기로 이름난 영국 의사당에도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의원이 등장했다. 비나데트 데블린이라는 이 여성 의원은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23세의 미혼인데다 노출이 심해 큰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다 이 젊은 여성 의원은 하원에 출석하여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내무장관에게 달려들어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소동이 벌어졌다. 그의 출신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도 유혈충돌에 대한 보수당 정부의 내무장관 보고가 편파적이라는 이유로 장관의 뺨을 때린 것인데 의사당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여성 의원은 계속 장관을 향해 돌진하려 몸부림쳤고 동료 의원들은 이를 제지하려는 바람에 그야말로 난장판.

그 순간 하원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며 ‘오더! 오더!’라고 소리쳤다. ‘오더(order)’는 ‘질서’를 의미하는 것.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여성 의원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시끄럽던 장내도 조용해졌다. 뺨을 맞은 내무장관은 발언대에서 ‘나는 집에서도 손주 녀석이 가끔 내 뺨을 때린다’고 말해 살벌했던 장내 분위기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검찰에 고소하거나 징계에 회부하는 일도 없었고 오직 의장이 ‘오더!’가 갖는 위력만 돋보였다.

이렇듯 그 권위가 존중되는 의장이지만 그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다. 어느 당에 소속돼서도 안 되고 엄정한 중립을 지키려고 동료 의원들을 만나거나 식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하원 의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최근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이른바 ‘브렉시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하원 의장이 파장의 중심에 있었다. 2009년부터 무려 10년간이나 의장을 지낸 존 바쿠어. 그가 의장직을 수행하는 10년 동안 ‘오더!’를 외친 게 1만4천번이나 되는데 그만큼 의장으로서 직권과 권위를 행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브렉시트에 대한 세 번째 승인 안을 바쿠어 의장이 직권으로 표결에 붙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두번째 부결시킨 것과 내용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브렉시트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의장은 정부에서 보내온 안건의 표결 여부를 결정할 권한도 있고 의원들의 발언권 부여와 토론 주제 설정 등에 대한 권한도 있다. 물론 의장의 브렉시트 투표 거부권 행사에 지지하는 여론도 많았다. 그러나 의장의 중립이라는 영국 의회의 오랜 전통을 훼손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없어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새 의장으로 린지 호일의원(노동당)이 당선됐다.

우리 국회의 박병석 의장이 6월19일 본회의를 열어 12명의 상임위원장을 선출하고 원 구성을 마무리 하겠다고 했으나 막상 6월19일 본회의를 목전에 두고 이를 전격 취소했다. 그러나 6월26일에도 지루한 협상이 결론 없이 진행되자 박 의장은 본회의를 6월29일로 연기했다. 여·야가 더 협상하라는 것. 그러나 막상 6월29일 마지막 담판은 깨졌고 민주당은 단독으로 국회 상임위원장 선출을 강행, 원 구성을 마쳤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있어 네가 있고,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상생의 원리를 우리 국회는 포기한 것 같다.

여가 있어 야가 있고, 야가 있어 여가 있으며 그래서 두 바퀴가 한 몸을 이뤄 민주주의를 이끌어 가는 것인데 앞날이 걱정이다. 결국, 국회의장은 고독한 자리라는 것만 각인시켜준 21대 국회 개원이 됐다. 의장의 ‘오더!’ 한 마디에 국회가 바로 잡히는 것을 우리는 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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