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실학번역총서’의 하나로 <상두지(桑土志)>가 간행되었다. 실학박물관의 지원으로 한양대 정민 교수팀에서 번역한 것이다. 정민 교수는 그동안 정약용의 저서로 잘못 알려졌던 <상두지>의 저자가 ‘이덕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저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은 이덕리의 불우한 운명에 따른 것이었다.
이덕리(1725~1797)는 경기도 양근 지역(오늘날 양평) 인물이다.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진도로 유배됐다. 친형인 이덕사가 정조의 즉위에 맞추어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했다가 오히려 대역죄인으로 처형당한 여파였다.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52세의 이덕리가 귀양 가고, 그의 세 아들도 뿔뿔이 흩어져 귀양 갔다. 진도에서 19년 반을 지낸 그는 1795년에야 섬을 벗어나 영암으로 이배되었다. 이곳에서 2년쯤 더 살다가 세상을 떴다.
이러한 처지였기에 저자가 이름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이 책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 다산 정약용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었다. 그의 책이 다산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습된 것이다.
<상두지>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에서는 둔전과 축성을 다루고, 권2에서는 서북지역에서의 구체적 축성 방법과 북방 기마병에 대적할 수 있는 여러 무기와 전술을 다루고 있다. 이덕리는 또한 이러한 국방 재원 마련을 위해 차무역을 제안했다.
이덕리는 왜 <상두지>를 썼을까. 책 제목 ‘상두’에서 저술 동기를 엿볼 수 있다. ‘상두’는 <시경>에 나오는데 ‘뽕나무 뿌리’란 뜻으로, ‘상토’가 아니라 ‘상두’로 읽는다. 올빼미가 장마가 지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둥지의 구멍을 얽어 큰비의 환난에 대비한다는 데서 온 것이다.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이다. 저자명을 밝히지 않은 서문에서도 저술 동기를 알 수 있다. 전란이 있은지 200년이 지나 모두 안이해진 것을 염려하며,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는 자’를 자임했다.
서문에서 임금의 행차 앞을 가로막는 죄를 무릅쓰고 책을 임금에게 직접 바칠 뜻을 밝히고 있는데, 한 연구자는 정조의 국방에 대한 관심도 저술 의욕을 촉발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자신을 불운에 빠뜨린 정조였기에 아이러니다.
<상두지>는 실학박물관 ‘실학번역총서’의 네 번째 책이다. 번역의 중요성은 새삼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우리 전통문화 콘텐츠가 한문으로 되어 있기에, 아무나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제대로 된 번역 한 편은 연구 분야를 확대시켜 학제적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 이번 국역 간행은 <상두지>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활용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태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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