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혐의가 알려지면서(?), 고소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언어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런 수많은 2차 가해 사례 중 가장 악질적이고 저급한 경우가 이순신 장군의 관노와 잠자리이다.
클리앙의 한 유저는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요. 그를 향해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건가요”라며 고소인을 신분제 사회의 노비로 여기고 성추행 의혹을 정당화하는 듯한 모욕적 발언을 했다. 조선시대 노비는 남종과 여종으로 구분하며 소유에 따라 사노와 관노로 구분했다. 관노는 관아에서 허드렛일에 종사했으나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었다. 그런데 수군절도사가 관노(남종)와 사통했다고 하다니.
관노 장사정(張士貞)은 연산현감 충민공을 좇아 출군했다가 현감이 활을 맞고 쓰러지자 그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며 곁을 떠나지 않다가 자신도 활에 맞아 죽었다. 시신을 수습해보니 현감을 안고 쓰러져 있었다. 그의 처 말종은 시집온 지 3개월 만에 남편을 잃고 자결했다. 이들을 연산 삼절이라 칭송했다. 또 같은 전투에서 사노 옥동과 기별은 경주 최 부잣집 중시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따라 출군했다. “주인이 충신이 되려 하는데 충노가 없을쏘냐.”라며 따라 순절했다. 그의 조카 기별은 경주 본가에 소식을 전하고 자진했다 한다. 경주 최 부자 집 불 천위 제사에서는 지금도 사노 두 분을 함께 제사 지내고 있다 한다.
‘클리앙 유저’에게 묻겠다. 네가 감히 이런 선비정신을 아느냐 이순신 장군은 왜 죽음을 알라지 말라고 유언했는지를 네가 아느냐. 정무공께서는 수지 전투에서 왜 ‘이곳이 나의 무덤’이라고 말했는지 너는 아느냐. 임전무퇴의 무신 선비들의 사생관 때문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무신들이 전투에서 죽는 걸 가장 큰 가치로 여겼기에 전쟁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무신 선비가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것이냐. 왜 무신 선비를 들 먹이는 건가. 항일 독립 하얼빈 의전에서 안응칠 장군은 장렬히 순국했으며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외쳤던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도 모두 무신 선비 정신의 4절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노비 4분도 자기 본분에 충실 했으므로 충노선비라 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 알량한 지식에 더하여 창기와 유녀, 예기 사노와 관노, 여종과 남종을 구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걸 모르고서 장군과 관노의 잠자리 운운하면 쓰겠는가. 왜군 부대 내에 군창을 설치하고 창기를 강제 동원한 사례를 두고 정신대니, 위안부 같은 왜색 식민 잔폐 용어를 사용하는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진용옥 경희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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