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파주 보광사의 대웅보전 안에서 하늘동자가 머리에 수박을 이고 있는 천장 벽화를 본 적이 있다. 불화의 감상보다는 문득 수박의 전래가 궁금해졌다. 확인해 보니 고려 말에 이미 재배되어 이색의 문집에 단맛과 외양을 찬사하는 시가 등장한다. 수박은 서과 혹은 수과로 불리며 불교의 공양이나 제례 의식 때 주로 사용되던 과일이었다. 인조 때 모문룡의 장수가 수박과 참외를 보낸 것을 보면 그때까지 서민들이 구하기는 쉽지 않은 과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수박은 효행이라는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혹서의 계절, 가족들이 빙 둘러앉아 얼음을 동동 띄어 먹던 여름철 수박화채가 생각이 난다.
이제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는 시대에 옛 사람들은 무엇으로 여름나기를 했을까. 더위를 없애는 8가지 일을 다산 정약용은 소서팔사(消暑八事)라 말했다. 솔밭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아래 그네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하기,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숲 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 오는 날 시 짓기, 달밤에 발 씻기의 추억은 4차 산업시대에 길들어 있는 우리에게 추억의 한편으로 떠오른다. 단지 이런 놀이방식만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이를 즐기는 시적 정서도 함께 소개했다.
조선시대의 이런 소서팔사는 놀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양과 산업과도 연계되었다. 퇴계 이황선생은 투호를 정심투호라 하여 정신을 집중하는 데 이용했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문신과 무신 모두 활쏘기에 집중할 것을 독려했다. 과녁에 맞추면 ‘지화자’라 부르며 즐겼다. 대자리에서 바둑 두는 것 역시 덥고 책 보기 싫은 날, 밥 내기 바둑을 두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한 잔의 술이다. 술은 연잎을 이용해 잎 가운데를 비녀로 찔러 술을 흐르게 하는 풍류를 즐겼다.
비단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은 신체수양과 상업적 위치를 차지한 것은 물론이다. 조선시대는 생활의 즐거움과 수양, 산업이 일치된 사회로 더위를 이기는 방법에도 풍류와 지적 취미가 존재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해 한 달 보름간 굳게 닫혔던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등 공공시설이 다시 문을 열었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놀러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맘껏 푸는 것도 소서팔사가 되겠지만 읽고 싶었던 책과 음악, 그림을 감상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인지학에서 자기 수양을 위한 위기지학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혼탁한 세상사에서 극기하는 일일 것이다.
차문성 파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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