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김홍일 장군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heohy@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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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 시간에 서울이 뚫렸다. 70년 전 얘기다. 그때도 비가 제법 내렸다고 한다. 6ㆍ25전쟁 초기, 정부의 대응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하지만 북한의 남침이 수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된데다,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군은 일방적으로 밀렸던 열세 속에서도 한강에서 엿새 동안 북한군의 저지를 막았다. 전차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에 소총 등 으로 맞선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전투였다.

▶이 전투 중심에 김홍일 장군이 있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는 육군참모학교장이었다. 사흘 후인 6월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 북방에서 분산 철수하는 국군 병력을 규합해 한강 방어선을 구축, 유엔군을 한반도에 파견하는 골든타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해선 뜻밖에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1898년 9월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소령으로 용담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상하이 병기창 주임으로,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열투쟁도 지원했다. 1945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 광복군 육성에도 힘썼다.

▶해방 후 국군이 창설되면서 육군 준장으로 특별 임관했다. 일본군, 특히 만주군 출신 장교들이 많았던 당시의 현실에선 드문 경우였다. 군 내부에서도 독립군과 광복군을 잇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1949년 소장으로 진급했고, 1951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군복을 벗고 주(駐) 대만 한국대사,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 광복회장 등도 역임했다. 1980년 8월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6·25전쟁 당시 한강전투를 통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엿새 동안 북한군의 남하를 막았던 공로를 인정, 태극무공훈장과 건국훈장 국민장 등을 수여했다. 타계 직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그를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6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추모행사가 열린다. 6ㆍ25전쟁 초기 북한군 남하가 저지되지 않았다면 전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김홍일 장군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외길을 걸어갔던 참 군인이었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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