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통합의 아이콘, 삼선생

답사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른 바 퇴계 이황선생이 남인의 종주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선생은 서인의 영수냐는 질문이다. 인문학과 철학의 영역을 딱히 한마디로 요약하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의 의도대로 퇴계 선생이 남인의 영수라는 가정하에서도 그 대(代)에서 남서인의 양분이 없었다면 퇴계 역시 서인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실상 노론, 소론, 남, 서인의 뿌리는 율곡의 대를 지나 김장생에서부터 태생하여 송시열 때 극에 달한다. 소위 예학의 뿌리를 둔 예송논쟁이 효종의 죽음을 두고 왕대비가 일 년 상복을 입어야 할지, 삼 년 상복을 입어야 할지 논쟁을 벌인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옷의 문제가 아니라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로 이어지느냐, 차자 효종으로 이어지느냐는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중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탕평책의 원조격인 사람이 바로 박세채다. 그는 서인과의 교유로 송시열의 손자가 그의 사위가 된다. 이런 그가 ‘삼선생 유서’를 짓고 파주에 우거한다. 여기에서 ‘삼선생 유서’는 퇴계의 성학십도, 율곡의 격몽요결, 우계의 위학지방을 합편한 책을 말한다. 왜 하필 이때 삼선생의 책을 지었을까. 짐작건대 극심한 당쟁으로 환국이란 죽음의 정치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몇 해 후 그의 인척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가 장희빈 아들의 원자 호를 정하는 것을 반대해 죽고, 남인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엉뚱한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사문난적이라 함은 유학의 근원을 어지럽히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목한 말이다. 그야말로 주관적이며 잣대도 없는 언어도단이 난무했다.

당시 박세채가 파주에서 ‘삼선생유서’를 편집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삼 선생과 관련한 한 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우계 성혼선생 묘역 입구에 있는 ‘청송 성수침 묘갈’은 이이가 행장을 기술하고 퇴계가 묘갈을 쓴 귀한 비석이다. 당시 문인 중 많은 사람이 당파와 지역을 막론해 퇴계를 흠모하고 존경해 온 것은 역대의 문장을 통해 알려진 일이다. 퇴계 이황선생이 파주의 선비 성수침의 묘갈을 적은 것은 그를 조광조로 이어진 성리학의 도학적 계보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조선 도학자의 걸출한 인물인 퇴계, 율곡, 우계 삼선생이 청송의 비석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분론과 의리론 사이에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는 지금 17세기 지식인이 ‘삼선생유서’를 편집한 것은 시대를 초월해 매우 의미 있다. 문묘에 종사된 삼인이 청송을 통해 의기투합한 사실은 자못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이다. 남을 공경하면 자신도 존경받는 법, 그 역시 문묘란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탕평책이란 예나 지금이나 묘수인 셈이다.

차문성 파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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