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듣다가 ‘어떻게 초등학교 때부터 빠짐없이 모든 학생이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받았는데 아직까지도 학교폭력은 끊이질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꿈과 미래, 성적에도 관심이 없고 생활기록부가 어떻게 써지든 상관없으며, 가정에 불화가 있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학교폭력의 일반적인 사례만 봐도 학교에서 가장 인맥이 넓고 돈이 많고 힘이 센 학생이 자신에게 밉보인 친구나 인맥도, 돈도, 힘도 없는 학생들을 괴롭힌다. 또 그 사이에서 자신에게 불똥이 튀길까 숨죽이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이러한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구조이다. 돈이 많고 인맥이 넓으면 강자, 그의 반대이면 약자. 이 모습은 우리나라 사회와 판박이다.
우리나라 사회 구조의 문제를 모르겠다면 이것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 목록과 기사만 봐도 얼마나 많은 비리가 눈감아지는지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자신이 아무리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에 나갔다 한들 권력을 지닌 사람 입김에 올바르던 가치관이 흔들리고 수많은 비리를 눈감으며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 누가 특별히 정의 내리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신분제에 억눌리며 산다. 이러한 발화점이 바뀌지 않는데 예방교육을 하는 시간보다 사회의 구조에 노출되는 시간이 훨씬 많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학교폭력예방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오히려 사회에 적응해 나가려면 눈치 있게 권력을 쥔 사람의 잘못은 못 본 척하는 것을 배워야 할 정도이지 않나. 어른들도 힘들어서 눈감고 방관하는 일을 학생들에게는 직접 나서라고 교육을 하는 건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여태까지 꾸준히 줄지 않는 학교폭력의 사례를 보며 학생들에게 예방교육을 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보고 배우는 사회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고 위험한 행위라고 해서 부딪히고 바꾸려는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너무 무기력한 삶이지 않을까. 이 무기력함을 깨려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으면 한다. 어른들이 먼저 시범을 보이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나면 어느 예방교육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사회는 ‘보이지 않는 신분제’, ‘낙하산’ 등과 같은 말이 없어지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다경 성남 복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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