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유적지로 고구려 후예를 표방하고 있는 구리시가 의미 있는 역사적 과제 수행에 착수했다.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기 직전, 전국 규모 항일투쟁조직인 ‘13도 창의군’의 출전 성지였다는 사실이 최근 입증됐기 때문이다. 구리 수택동이 대규모 서울 진공작전의 집결지로 확인되면서 항일투쟁사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구리시가 항일역사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편집자 주
<상>13도 창의군 출전 성지
“항일항전 역사가 새롭게 정립돼야 합니다.”
구리시가 지난달 21일 시청에서 13도 창의군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주문들이 제기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그동안 학계에서 간헐적 연구가 진행돼 온 13도 창의군에 대한 폭넓은 연구사업, 또 투쟁 근거지로 구리지역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황태연 교수(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김종욱 교수(경희대 외래교수), 이영재 교수(한양대 연구교수) 등은 “13도 창의군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의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말 지금의 구리에서 조직된 전국의병 부대였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항전 역사의 새로운 정립을 주문했다.
13도 창의군은 1907년 11월 지금의 구리시 수택동(옛 양주군 관할)에서 결성돼 서울 탈환 독립전쟁을 개시한 ‘원수부 13도창의대진’을 지칭한다.
1904년 갑진왜란(일제의 재침)으로 일본군에 의해 퇴출당한 대한제국 진위대(지방 주둔 군대조직)와 전국에서 항거를 벌이던 민간의병으로 편성된 국민군, 여기에 1907년 8월 고종 퇴위에 이어 군대해산으로 합류한 대한제국 시위대 등으로 구성됐다.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등으로 13도 창의군이 결성됐으며 40여년이 지난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맞선 항쟁의 긴 물꼬를 열었다.
이들의 주요 투쟁기간은 1907년에서 주권이 강제로 침탈받기까지 3~4년으로 요약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국내는 물론 만주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쟁사를 이어왔다.
병력은 한때 5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구리 수택동을 근거지로 구체적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했지만, 후속 부대의 합류지연 등으로 결국 목적 달성에는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록 서울탈환작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190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는 시기는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점에 학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게다가 이 당시 13도 창의군은 구리를 중심으로 서울 근교 곳곳에서 왜군토벌작전을 수행했고 전투력도 왜군을 능가했다는 것이다.
구리시 수택동이 이처럼 출전의 성지로 점지 된 데는 서울 근접지인데다 왕숙천을 끼고 사방 10리의 평야를 이루고 있어 많은 병력 집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황태연 교수는 “13도 창의군은 이후 모든 대한독립군과 대한광복군 등의 뿌리가 됐고 첫 전투를 개시한 곳이 구리였다”면서 “그 치열했던 독립전쟁의 역사적 현장, 구리에서 100여년 전 13도 창의군의 활약상을 재조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위대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구리=김동수기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