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보다 심각한 건 가난이라고들 이야기한다. 재난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다. 또한 위기에서 겪은 감정의 상흔을 회복하고자 우리사회는 어쩌면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많은 시간과 직·간접적 비용을 필요로 할 것이다.
제목의 글귀는 ‘삼일로 창고극장’ 외벽을 30년간 지키는 현수막의 문장이다. 연극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이 문장을 내가 처음 만난 건 이십 년 전 그러니까 21세기가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속도와 효율성을 미덕으로 여기고 모두가 ‘빨리빨리’와 ‘새 것’을 외치던 때, 버스를 타고 삼일대로를 지나던 어느 저녁이었다. 역사와 유행이 공존하는 서울 명동의 도로변 언덕 위에 자리한 낡은 소극장 외벽의 현수막에 새겨진 이 스물두 글자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순간 뇌리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조용필 30주년 기념콘서트가 열린 1998년의 어느 공원. 공연장으로 분한 야외 잔디밭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삼삼오오 막걸리를 마시며 ‘그 겨울의 찻집’의 하이라이트인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목 놓아 울던 우리 아버지들과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었다. 이때는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맞은 이듬해였다. 대규모 실직과 가난의 슬픔을 모두가 공감하듯 관객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으며 그들을 말리는 진행요원도 없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바라본 이 낡은 극장은 마치 이 글귀가 육화된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주변 건물과 골목 등에 질서를 부여하며 도시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으로서의 공간이었다. 뒤로는 명동성당의 탑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글귀를 만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더욱 절실하게 이 문장이 다가온다. 가난이 물질적은 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개 가난한 자이거나, 고통받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슬프고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를 보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자리가 있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그 너머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세기가 바뀌어도 불가항력적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도 예술이 늘 인간을 위로해 왔다는 사실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동시대와 호흡하며 예술은 창의적 방법으로 미래를 당겨오기도 했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예술’에 관한 한 이 이상의 울림을 주는 글귀가 또 있을까? ‘예술’ 외에 다른 어떤 주어가 가능할까? 언젠가 지인들과 이런저런 주어를 대입해 보았다. 비슷한 다른 단어를 찾긴 했어도, 그 어떤 단어도 그 크기와 깊이가 ‘예술’만은 못했다.
주홍미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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